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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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시대다] 80년대라는 어둡고 검은 터널의 기억

입력 2018-02-28 05:05:01

 
폭력과 고문이 난무하는 경찰서 지하 취조실의 풍경. 영화사 제공
 
영화 '살인의 추억'의 포스터. 영화사 제공
 
가짜 범인과 진행한 현장검증은 아수라장이 된다(위 사진). 2003년의 시점으로 미결사건을 다시 대면한 박두만(송강호)의 마지막 얼굴. 강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는 끝내 범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아래 사진). 영화사 제공
 
봉준호 감독


1986년 9월 15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의 목초지에서 70대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후 6년 동안 화성 일대에서만 10명의 여자들이 강간 살해되었다.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수사가 이어졌지만 이 끔찍한 살해 행각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2006년 마지막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범죄의 결과는 있으나 범인은 없는 희대의 사건은 지금까지도 여러 영화와 TV 드라마의 모티브가 되고 있다. 1996년 극작가 김광림은 이 사건을 소재로 '날 보러와요'라는 작품을 썼고 무대에 올려 큰 반향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2003년, 감독 봉준호는 이 연극을 각색한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80년대를 되돌아보았다. 몇몇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아직은 남아있던 시기였다.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과 관련된 인터뷰에서 80년대 한국사회를 이렇게 압축한 바 있다. “누가 나에게 ‘8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등화관제의 시대요’라고 말할 거다. 그건 인위적인 어둠을 만드는 행위다.” 그의 말대로 8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회에서는 등화관제 훈련이 자주 실시되곤 했다. 전쟁 대비를 구실로 삼은 이 훈련은 실은 반공 이념을 부추기며 전쟁의 공포를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수단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적인 삶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효과적으로 과시하며 개인의 일상에 내면화된 국가의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봉준호가 한국의 80년대를 ‘등화관제’라는 말로 환기하며 ‘살인의 추억’에 대해 말할 때, 이 영화가 겨냥하는 질문은 단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실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저 “인위적인 어둠” 속에서 과연 무엇이 보이는가. 대낮의 벌판에 시신을 내팽개친 저 밤의 정체를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도입부에서 형사 박두만(송강호)이 벌거벗은 여자의 시신을 발견하는 농수로의 음산함과 음울함은 이 영화가 끈질기게 응시해야만 하는 시공간의 성질이다.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취하는 장르물에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것들이 있다. 범행 현장을 목도하는 데서 생기는 긴장감, 범죄의 원인과 범인을 추리하는 데서 발생하는 쾌감, 범인의 처벌을 응시하는 데서 오는 안도감.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이 안기는 장르적으로 세공된 감정은 그러나, ‘살인의 추억’에서는 불가능하다. 실제의 사건에서 진범을 찾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누가 범인인가’를 물을수록 그 질문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이상하고 무력한 방식으로 지탱되는 세계다. 범인에게로 시야를 좁혀가는 장르적인 추동력은 이 세계에 번번이 끼어드는 무지와 오인, 헛발질과 헛소동으로 멈춰 세워진다.

말하자면 ‘살인의 추억’에서는 두 개의 힘이 부딪친다. 하나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범죄물의 관습으로 포괄하려는 장르적인 시도다. 다른 하나는 그런 시도를 끈질기게 실패시키며 이 세계를 혼돈과 미궁에 빠뜨리는 현실의 저항력이다. 그 저항력은 일관된 장르적 규범으로는 접근되거나 해소될 수 없는 당대 한국사회의 정치 사회적 얼굴과 관련이 있다. 어떤 얼굴일까.

우선 공권력의 전근대성과 폭력성을 거론해야 할 것이다. 살인사건에 접근하는 영화 속 형사들의 수사방식은 일차원적이고 허술하다. 그들에게는 사건이 벌어진 현장을 보존해야한다는 개념조차 없다. 영화의 초반 첫 희생자가 농수로에서 발견되었을 때, 저 멀리 벌판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그의 속옷을 서로 빼앗으며 천진하게 놀고 있다. 형사들은 과학적인 논리가 아니라 위험한 직감에만 의존해서 범인을 추론한다. 심지어 오리무중인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추려낸 용의자들은 경찰서 지하 취조실에 감금되어 형사들이 원하는 답을 할 때까지 고문을 당한다. 폭력은 적극적으로 용인된다.

이것은 서울이 아시안게임이라는 국제대회의 개최지가 되어 선진국을 운운하던 같은 해에 버젓이 벌어진 일이다. 영화는 이 어처구니없이 비이성적인 풍경을 형사 개인의 미개함이나 범인 개인의 사악함만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을 80년대의 구조적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동시대와 동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특수한 범죄가 아니라, 동시대의 속성 그 자체이자,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가 공격적으로 전개하는 일련의 몽타주는 영화가 겨누는 곳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식이다. 비가 오는 날이다. 달리 말하면 사건이 예견되는 날인 셈이다. 그런데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손에 태극기를 쥐고 한복을 입은 채, 대통령 지방 순시를 환영하는 행사에 동원되고 있다. 여자들이 무참히 살해된 곳에서 비를 맞으면서 말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시위를 하는 학생들과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하는 전경들이 등장한다. 살인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경찰병력은 사건 현장이 아니라 시위 현장에 모조리 투입된 것이다. 다음 장면에서는 남자 형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자 경찰이 비오는 밤길을 혼자 위태롭게 걷고 있다.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는 함정수사는 금세 실패한다. 하지만 그 시간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여자가 범행의 표적이 되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그 밤이 지나서야 밝혀진다.

살인은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났겠지만 이 사건의 연쇄를 중단하지 못한 원인들은 한국사회 도처에 있다. 영화 속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군부독재, 고문치사, 이념공세, 성폭력(같은 해 일어난 부천경찰서의 여대생 성고문사건이 TV 뉴스를 통해 잠시 스쳐간다) 등 한국사회의 구조적 폭력성을 명백히 환기한다. 영화는 연쇄살인사건을 중심에 두고 여기저기 부유하는 원인들을 마주하는 동시에 곳곳에서 출몰하는 이상 징후들 또한 감지한다. 대표적인 예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가 비극적으로 죽는 백광호(박노식)의 경우다.

그는 살해당한 여자들 중 한 명을 쫓아다닌 적이 있고 지능이 좀 모자라다는 이유로 박두만의 표적이 된다. 그의 얼굴에는 어린 시절 입은 화상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상한 것은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다음에도, 영화가 그를 모호한 상태로 끈질기게 이 세계로 불러들인다는 점이다. 그는 사건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자로 추정되지만 이 유일한 목격자는 자신이 본 것을 발화하지 못한다. 그는 그 진실 앞에서 과거에 겪었던 화상의 트라우마로 돌아갈 뿐이며, 결국 이 세계에 무의미한 피의 얼룩을 더한 채 사라져버린다.

그러니까 이곳에는 원인들이 포화되어 있고, 이상 징후들이 흩어져 있으며, 시체라는 차가운 결과가 쌓여 가는데, 이들 사이에 명징하고 결정적인 인과론은 맺어지지 않는다. 많은 요소들이 들끓지만 무엇도 명쾌히 설명되지 않는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진범으로 거의 확신되던 박현규(박해일)마저 DNA 감식 결과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형사들은 터널 속으로 절뚝거리며 사라지는 박현규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볼 뿐이다. 터널은 마치 진실을 모두 삼켜버린 시커먼 목구멍처럼 보인다. 그것의 정체는 여전히 알기 어렵고, 우리는 영화의 초반, 박두만이 농수로의 어둠을 들여다보던 그 자리로부터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에필로그는 2003년으로 건너뛴다.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아침식사 장면 안에는 박두만과 아내, 그리고 두 아이가 있다. 그는 더 이상 형사가 아니라 녹즙기를 판매하는 평범한 가장이 되어 있다. 그 사이 한국사회는 직선제를 쟁취했고 군부독재가 끝났으며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외환위기를 지났다. 정치가 아니라 시장자본이 우리를 집어삼키는 검은 입이 되었다. 80년대의 암담한 사회구조 속에서 맨몸으로 범죄와 싸우던 거친 형사는 21세기의 물결에 가까스로 적응하며 돈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노련한 외판원으로 변해 있다.

아니, 과연 무엇이 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끝에 박두만은 첫 번째 희생자를 발견했던 농수로 앞으로 우연히 돌아온다. 그때 한 소녀가 나타나 묻는다. “거기 뭐 있어요?” 소녀는 수로를 들여다보며 예전에 자기가 한 일이 생각나서 들러봤다고 말하던 어떤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마치 그동안 저 밑바닥에 묻어둔 괴물이 불현듯 깨어난 것처럼, 회사원 박두만의 매끈한 얼굴은 어느새 불안함과 불길함으로 팽창된다. 박두만의 마지막 얼굴 클로즈업은 1986년과 2003년 사이의 시간적 물리적 정서적 거리를 한 번에 당겨버린다. 그 사이 많은 것들이 바뀐 듯 보이지만, 그건 단지 우리의 기만적인 환상일 뿐이라는 것일까.

80년대에 해결되지 않은 것들의 자리는 2003년에도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다. ‘살인의 추억’이 80년대로 돌아간 이유는 결국 2003년의 현실을 바라보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20세기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이기도 하지만, 21세기에 대한 더없이 허무하고 비관적인 냉소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망각을 허용하지도, 진보나 변화를 믿지도 않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서는 저 검은 터널 앞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기억하며 무엇을 말할 수 있냐고 자꾸만 묻는다.

■ 봉준호 감독은…
2006년 '괴물'로 1000만 동원… 한국 영화사 새 지평 열어


봉준호(49·사진)는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졸업 작품인 '지리멸렬'은 심리학자 언론인 검사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사회 지도층의 허위의식을 꼬집으며 이후 봉준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게 될 세계관을 엿보게 했다. 이후 '모텔 선인장'(박기용)과 '유령'(민병천)의 시나리오를 썼고 2000년에는 한국영화사의 독창적인 데뷔작으로 기억될 '플란다스의 개'를 공개했다. 현실에 대한 씁쓸한 인식과 종잡을 수 없는 괴이한 유머감각이 창의적으로 호흡하는 영화였다.

두 번째 영화인 '살인의 추억'은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며 대중의 관심과 평단의 호응을 얻는 데 성공했다. 2006년에는 분단국가인 한국의 현실정치와 계급문제를 괴수장르로 야심차게 버무린 '괴물'로 한국영화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영화는 10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2009년에는 모성이라는 외피를 두른 광적이고 성적인 세계, '마더'를 선보이며 다시 한번 자신의 지평을 놀랍게 갱신했다.

4년 뒤에는 오랜 준비 끝에 할리우드로 진출해서 송강호, 고아성, 틸다 스윈튼, 크리스 에반스 등과 '설국열차'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전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으며 다양한 국가들에 성공적으로 판매되고 세계 각지에서 개봉되었다. 그리고 2017년에는 넷플릭스와 손을 잡고 만든 또 다른 글로벌 프로젝트 '옥자'를 선보였다. 한국 시골 마을 출신 소녀가 슈퍼돼지 '옥자'를 지키기 위해 미국의 다국적 기업과 싸운다는 이야기는 제70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기도 했다. 현재 봉준호는 오랜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등과 함께 '기생충'을 준비 중이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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