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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안창호]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입력 2019-07-25 12:05:01


일제 강점기의 강제징용과 관련된 피해자 배상 문제로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 1965년 한·일 간 청구권협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된 게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이에 일본 아베 정부는 이 판결이 부당하다며 핵심 소재·부품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한 데 이어 추가 조치를 예고하고 있다. 문재인정부는 국민에게 힘을 모아 달라고 호소한다. 청와대 당직자와 여권 인사들은 동학혁명을 칭송한 ‘죽창가’를 말하고, 구한말의 의병활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언급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일제 강점기의 죄과와 현재의 경제적 압박에 분개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상황은 엄중하다. 국민 모두가 슬기를 모아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무책임한 말잔치가 아닌 숙고 끝에 마련한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란 개인이 정치공동체 내에서 정치적 지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자기결정과 자기지배’의 결과로 나타나는 통치 형태이다. 구성원은 공동체의 실체와 내용을 결정하므로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현대 국가의 복잡한 국내 및 국제 문제를 합리적이고 국가 이익에 부합하도록 해결하기 위해서는 충동적인 감성과 감각을 중시하는 파토스(pathos)가 아니라 합리적인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로고스(logos)에 의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민주사회에서 국가 및 사회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 결론에 도달하는 이성적 사유 과정은 많은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감성과 이기적 욕망에 쉽게 반응하기도 한다. 더욱이 SNS의 발달로 진실을 알기 위한 노력이나 밝혀진 사실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 대신 단편적이고 편집된 정보와 감성적 호소가 난무한다. 포스트모던화된 군중은 감성과 욕망의 파토스 세계로 이끌리기 쉽다. 정치지도자들은 정치적 또는 당파적 목적을 위해 이러한 국민감정을 자극하고 선동하곤 한다. 이는 국가 이익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매국(賣國) 행위가 될 수 있다.

민주사회의 의사결정이 민주적 정당성과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계몽된 지성’과 합리적 숙고에 기초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는 국가의 이익과 힘의 논리가 우선한다.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대립과 갈등의 한·일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현실 인식의 바탕에서 당파적 가치나 이익이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공동 가치와 이익이 궁구(窮究)되어야 한다. 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과 일본의 공동 가치와 신뢰 증진이 강조되어야 한다. 한·일 문제 해결은 국민 모두가 국민감정이 아닌 국가 이익을 숙의(熟議)하는 가운데 도출될 수 있다. 국제평화주의에 입각해 국제법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대한민국의 국가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헌법은 전문에서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라고 국제평화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헌법은 제5조에서 국제평화주의를 다시 구체화하고 있다. 이어 제6조에서는 국제법 질서를 존중하며 외국인의 법적 지위를 보장함으로써,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국제적 평화공존의 질서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성경은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도서 7장 9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뺏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16장 32절)’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되나니 지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고 말씀한다(잠언 20장 18절).

일본 정치지도자들 역시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성과 일본 평화헌법의 역사적 의미를 성찰하면서 문명국가의 보편적 헌법원칙인 국제평화주의에 입각해 한·일 간 현안 문제 해결과 새로운 관계 설정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안창호 전 헌법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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