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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하윤해] 태극기와 촛불을 제자리로 돌려야

입력 2019-10-09 04:05:02


미국 국가(國歌)의 공식 명칭(Star-Spangled Banner)을 우리말로 옮기면 ‘별이 아로새겨진 깃발’이다. 성조기가 국가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영국과 당시 신생 독립국이었던 미국은 1812년부터 1815년까지 ‘1812년 전쟁’이라는 이름의 전투를 벌였다. 선전포고를 한 쪽은 미국이었지만 공격을 가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1814년 8월 24일 영국군은 워싱턴에 들어와 불을 질렀다. 다음 목표는 워싱턴과 인접한 항구도시 볼티모어였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프랜시스 스콧 키다. 법률가이면서 아마추어 시인이었던 키는 당시 볼티모어 앞에 떠 있던 영국 군함에서 포로 교환 문제를 상의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공격 계획을 키가 눈치 챘다는 이유로 군함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다. 영군군의 타깃은 볼티모어 항구를 지키는 맥헨리 요새였다. 이 요새를 함락시켜야 볼티모어 상륙이 가능했다. 영국 군함은 9월 13일 밤 내내 맥헨리 요새를 향해 대포를 쐈다. 날이 밝자마자 키는 갑판 위로 뛰어 올라갔다. 맥헨리 요새에 걸려 있는 성조기가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편지지를 꺼내 시 한 편을 썼다.

“(앞부분 생략) 대포 탄환의 붉은 섬광과 창공에서 터지는 폭탄은 밤새 우리의 깃발이 그 자리에 여전히 있었다는 증거다/ 오, 자유의 땅과 용감한 이들의 집에서 별이 아로새겨진 깃발은 아직도 휘날리고 있는가.”

이 시는 영국의 음주가(飮酒歌) 멜로디에 실려 노래로 불렸다. 이후 1931년 미국 국가로 공식 채택된다. 약간의 수정을 거치긴 했지만 미국 국가 멜로디의 모태가 술을 권하는 노래였다는 점도 이채롭다. 일부에선 ‘대포 포탄’ 등의 표현이 있다는 이유로 미국은 국가마저 제국주의 침략 정신을 담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공격을 가하는 때가 아니라 침략을 당할 때 쓴 가사다. 다만, 미국에서도 아무리 국가 방어라고는 하지만 전쟁을 소재로 한 국가는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성조기도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됐다. 1984년 8월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렸던 댈러스에서 시위대가 성조기를 불태운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미 연방대법원은 ‘5대 4’로 성조기를 태운 행위도 성조기가 상징하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된다고 무죄 결정을 내렸다.

지난 6일 시카고에서 열렸던 한국과 미국의 여자 국가대표 축구 친선경기를 후반 중반부터 TV로 우연히 보게 됐다. 세계 랭킹 1위라는 미국은 파상공세를 퍼부었고, 우리 선수들은 온몸으로 막았다. 유니폼 왼팔 쪽에 붙어있던 태극기의 무게를 생각했다. 류현진 선수에겐 미안하지만 그가 LA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나섰던 경기보다 더 떨리고 긴장됐다. 키라는 인물이 포연 자욱했던 이른 새벽, 요새의 성조기를 보면서 느꼈던 205년 전 감정이 이해되는 이유다. 태극기란 그런 것이다. 1987년 7월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앞장섰던 태극기는 하나된 슬픔이었고, 2002년 월드컵의 태극기는 하나된 기쁨이었다. 촛불은 또 어떤가. 2016년 가을에 시작돼 이듬해 봄까지 이어졌던 촛불집회는 부정한 구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열겠다는 하나된 열망이었다.

그러나 지금 태극기는 ‘박근혜 석방’에 이어 ‘조국 구속’이라는 슬로건에 이용된다. 촛불도 ‘조국 수호’ ‘검찰 개혁’이라는 구호 속에 타 오른다. ‘태극기 모독단’이라는 비아냥도 이해되고, ‘우리가 조국이다’는 외침과 함께하는 촛불도 낯설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줄 알면서도 정파적 집회엔 태극기와 촛불을 들고 나오지 못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아니면, 진보·보수단체 지도자들이 태극기와 촛불을 서로의 정치집회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대타협이라도 맺었으면 좋겠다. 기대치를 낮춰 최소한 조국 법무부 장관 찬반 집회에서만이라도 태극기와 촛불을 그만 봤으면 좋겠다. 온 국민을 하나로 모았던 태극기와 촛불이 충돌하는 정치세력의 상징적 이미지로 전락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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