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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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칼럼] 한반도 운전석에는 누가 앉았는가

입력 2019-10-15 04:10:02


북한은 美 대선을 앞둔 트럼프 입장을 최대한 활용해 벼랑 끝 전술로 충분한 대가를 요구
문재인정부 희망과 달리 北의 대남전략 시계는 계속 도는데 평화 무드에 취한 우리 경각심은 와해 직전


북핵 협상이 과거 패턴으로 돌아가고 있다. 화려한 평화쇼와 함께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질 듯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원점으로 돌아오고, 흐른 시간만큼 북한은 핵무기 국가에 성큼 다가가는 패턴 말이다. 이번에는 혹시 했는데 또 역시인가.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조정관은 현재로선 북한의 핵 폐기는 고사하고 핵물질 생산 동결도 이루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견을 미국의 다수 전문가들이 같이한다.

과연 지금 한반도 상황의 주도권은 누가 쥐고 있는 것일까. 누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가. 미국인가, 한국인가. 아니다. 지난 2년을 복기해보면 한국이 비추는 ‘햇볕’을 이용해 북한은 어느덧 운전석을 차지했다. 극적인 비핵화 평화 이벤트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핵물질과 핵무기는 차곡차곡 쌓여가고, 이스칸데르형 미사일과 대형 방사포 등 그들의 신종 준전략무기들은 체계를 갖췄다. 게다가 게임체인저라고도 불리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도 실전배치 직전까지 왔다. 조선신보는 북극성 3형이 ‘또 하나의 핵 억제력’이고 ‘북·미 대화는 핵 가진 양국의 안보불안 해소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비핵화 협상의 본질이 핵을 보유한 나라들의 핵 감축 문제라는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북·미 대화를 지렛대로 불편했던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과정을 밟았다. 사실 김정일 시대에도 북·중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친중파인 장성택 제거 등으로 북·중 관계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비핵화 대화에서 미국을 쿠션 삼아 북·중 관계는 혈맹 관계를 회복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동북아 패권경쟁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러시아하고도 가까워졌다. 북·중·러 동맹의 회복과 함께 비핵화의 강력한 압박 수단이었던 경제제재는 헐거워졌다.

또한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읽고 있다. 탄도미사일이 유엔 결의를 밥 먹듯 위반해도 못 본 척하면서 트럼프가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 없는 북한을 만들었다고 홍보할수록 북한은 그 빈틈을 파고든다. 북·미 실무회담도 ‘새로운 계산법’을 가져오라면서 고자세다. 대선 전에 북한이 사고 치길 바라지 않는 트럼프의 입장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심산이다.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에 의하면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가진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옵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트럼프는 이란 터키 등에서 말만 거칠었지 정작 군사적 행동에는 소극적이었다.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는 피 묻히지 않고 주머니를 부르게 하는 것이지 주머니 털리고 피 흘리는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는 ‘자유의 이념’을 앞세운 네오콘과 다르다. 이를 안 북한은 그들의 ‘전통의 보검’인 벼랑 끝 전술을 밀고 나간다. 신고와 검증이라는 완전한 비핵화에 꼭 필요한 의제는 테이블에도 못 올리게 한다. 핵무기 하나라도 없애려면 대가를 충분히 치르라는 것이다. 경제제재 해제나 한·미 연합훈련 영구중단 등 말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존재감은 미미해졌다. 북·미 회담을 성원하고 9·19 군사합의 등 치어리더 역할을 했는데 북한은 한국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미사일이 펑펑 날아도 한국은 감싸는데 북한은 ‘삶은 소대가리 운운’ 등 망발을 일삼는다. 일종의 한국 정부 길들이기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 순간에도 북한의 대남전략 시계는 계속 돌고 있다. 그들의 대남 전략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다. 근본 전략은 연방제를 매개로 한 통일 전략이다. 응용 전략은 대한민국을 둘로 쪼개 정세를 흔들고 이 균열을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안보 환경과 세력 연합을 추구하는 통일전선 전략이다. 그동안 우리는 평화 무드에 취해서 그들의 전략이 차근차근 실행되고 있다는 점을 과소평가해 왔다. 북한은 대한민국 정치 정세와 주요 선거의 내재적 변수가 되길 원했고 그렇게 되고 있다. 북한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는 충동이 있는 한 그들이 한국 정치를 이용하는 전략은 수월하게 작동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내년 총선에 북한이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고 영향을 주려 할 것임은 불문가지다. 이에 비해 우리의 대응이나 경각심은 거의 와해 직전이다. 어쩌면 저들의 신형무기들의 위협보다 흐물흐물해진 우리의 안보의식이 더 큰 안보위기 요인이다.

문재인정부는 김정은이 김정일과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대북 정책을 펼쳤다. 다른 길을 가려는 북한의 손을 잡아주면 북한이 따라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2년여가 지난 지금 북한은 여전히 과거의 북한이다. 오히려 그 틈새를 이용해 북한은 한반도의 운전석에 앉아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북한의 힘과 야욕은 더 커졌다. 그 위협을 과소평가한 대가는 혹독할 수 있다. 이 정권이 이런 현실을 애써 안 보려 한다는 점이 우리를 더 불안하게 한다.

박형준(동아대 교수·전 국회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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