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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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황교익] 가을 들판에서

입력 2019-10-16 04:10:02


벼가 여물었다. 나락을 손으로 훑으면 차르르 소리를 낸다. 묵직하고 단단하다. 볕을 받고 있음에도 서늘하다. 물 기운이다.

벼는 물에서 자란다. 물에서 싹을 틔우고 무논에서 여름을 견딘다. 비가 와도 논엔 물이 차 있고 가물면 논에 물을 채운다. 벼꽃이 피고 나락에 쌀의 살을 채우고 나서야 논에서 물을 거둔다. 봄부터 가을까지 내내 물을 먹으며 자란다. 그러니 쌀 한 톨에 서늘한 강 한 줄기는 들어찼을 것이다.

밥을 지으면, 쌀에 갇힌 강줄기가 풀리어 쌀의 본성을 보인다. 밥알의 겉이 매끈한 것은 물의 결이 그런 것이고, 밥알에 탄력이 있는 것은 물의 몸이 그런 것이며, 밥알에 흐린 단맛이 있는 것은 물의 성징이 그런 것이다. 밥이 물이니, 밥을 한평생 먹었던 내 몸 안에도 거대한 강이 흐를 것이다.

콩잎이 말라간다. 콩은, 줄기에는 콩을 달고 뿌리에는 혹을 단다. 뿌리혹박테리아라는 예쁘지 않은 이름이 붙었으나 하는 짓은 미덥다. 공기 중의 질소를 뿌리에 혹으로 받아서 제가 먹을 만큼만 먹고는 땅에다 그 혹으로 질소를 남겨 제 주변의 나무며 풀이 먹고 살게 해준다. 나만 살겠다 고집하지 않고, 남을 살게 한다.

날콩이 비리고 쓴 것은 이 이타의 삶에서 온 것이다. 달고 고소한 것만 콩에다 남겨서는 저 혼자의 잘난 삶만 보일 것이니 비리고 쓴 맛도 그 안에다 박아 넣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자잘한 뿌리에 남을 위한 혹이 있었음을 알린다. 인생은 비리고 쓴 맛이 붙어 있어야 아름답다. 콩을 한 움큼 쥐고 내 작은 뿌리혹박테리아에게 안부를 묻는다.

두둑을 잡지 않은 비탈 밭에 팥이 자란다. 날을 잡아 씨앗을 뿌리거나 거름을 내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심한 주인을 만났어도 가을이면 꼬투리 안에 자잘한 콩알을 채운다. 붉다. 거름 없이 비탈 흙의 메마른 기운만 바짝 받아서 올려 이를 여유 없이 굳히느라 돌같이 붉다.

어데서 튀어 날아온 씨앗이 있었는지 녹두도 올랐다. 새가 물어서 날랐을 수도 있다. 바닥에 붙은 꼬투리는 이미 저절로 터져 빈 깍지들만 너덜거린다. 나비같이 생긴 노란 녹두꽃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연록의 꼬투리가 자라고 가을이면 그 꼬투리가 숯덩이처럼 까맣게 변한다. 검은 꼬투리를 손에 꼭 쥐면 녹두가 강력한 힘으로 튕겨서 나온다. 폭탄 같다. 전봉준을 녹두장군이라 한 것은 키가 작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들판과 마을의 경계에 토란이 줄을 지어 장승처럼 섰다. 밭이라고는 보기가 어렵고, 가용으로 키웠을 것이다. 토란은 한반도 남쪽 저 멀리의 열대 지방이 고향이고 거기서는 추운 겨울이 없으니 잎과 줄기가 말라죽는 일은 없으며 그러니 주인이 없어도 잘 자란다. 한반도에서는 ‘흙의 알’로만 겨울을 넘겨야 하고 그러니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옥수수를 아직 베지 않았다. 옥수수자루는 다 거두었고 옥수수대는 소 여물로 쓸 것이다. 키 큰 옥수수 위로 맑은 가을 하늘이 펼쳐지고 하이얀 뭉게구름이 떴다. 한반도의 친숙한 가을 풍경인데 옥수수의 연원을 생각하면 그 맑은 가을 하늘은 안데스의 어느 하늘일 수도 있다. 지구를 덮고 있는 하늘은 다 같은 하늘이니 안데스의 하늘과 이 한반도의 하늘이 다르지 않다. 친숙한 이 지구의 풍경 안에 옥수수가 있다.

나는 안데스를 가보지 못하였다. 텔레비전에서 안데스의 사람들이 옥수수를 갈아서 반죽을 하여 반대기를 만든 후 번철에 구워서 먹는 것을 보았다. 안데스의 사람들은 신이 옥수수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지난 늦은 여름 바닷가에서 먹었던 찐 옥수수 맛을 떠올렸다. 늘 그렇듯 멈추지를 못하였다. 냄새 때문이다. 평안하다. 다 먹고 난 다음에도 손에 묻은 옥수수 냄새를 맡는다. 옥수수가 풀이니 풀 냄새이다. 풀이 익으면서 내는 냄새이니 여물 냄새 같기도 하다. 가을날 햇볕을 잔뜩 받은 시골 흙담에서 나는 냄새이다. 옥수수에서 향수를 느끼는 것은 풀 냄새나 여물 냄새 때문일 것인데, 같은 하늘을 지고 있는 안데스의 사람도 이 옥수수 냄새에서 향수를 떠올릴 것이다. 어느 인간이나 고향은 있으며, 그 고향의 하늘들은 마른 옥수수 수술이 하늘거리는 안데스의 하늘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며 가을의 들판을 걷는다.

황교익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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