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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 촘촘하게 직조 ‘순정만화=사랑 이야기’ 공식 타파

입력 2020-03-27 12:05:02
작가 신일숙은 관습적인 젠더 관념을 전복한 여성만화로 1980년대 만화 부흥기를 이끌었다. 신일숙이 그리는 여성은 자기연민에 사로잡힌 순정만화 속 여성 캐릭터와 달리,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간다. 거북이북스 ⓒ최민호
 
‘아르미안의 네 딸들’. 거북이북스 ⓒ신일숙
 
‘1999년생’. 거북이북스 ⓒ신일숙
 
‘리니지’. 거북이북스 ⓒ신일숙




‘만화방 만화’는 1960년대 한국만화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독점과 심의로 인해 독자층을 확장하는 데 실패하면서 불량한 어린이 문화쯤으로 취급받았다. 1980년대가 되고 독점 구조가 깨지고나서야 허영만 이현세 황미나 신일숙 김혜린 등 신진 작가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허영만의 ‘무당거미’, 황미나의 ‘불새의 늪’, 김혜린의 ‘북해의 별’ 등 신예들의 작품이 인기몰이하며 만화방을 찾는 독자들의 나이대도 높아졌다.

신일숙은 1980년대 만화부흥기를 이끈 작가 중 한 명이다. 흔히 순정만화 작가로 불리지만 정정할 필요가 있다. 순정(純情)은 1950~60년대 ‘순수한 감정’을 담은 만화를 구분하는 용어로 등장했다. 초기 순정만화는 마음 착한 소녀가 고생 끝에 복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주로 담았다. 자기희생과 자기연민에 바탕을 둔 소녀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고난을 인내하지만, 결코 운명의 주인은 되지 못했다. 자기연민에서 탈출해 운명의 주인이 된 여성 주인공은 1980년대 여성만화에서나 본격화됐다.

1986년에 발표되기 시작해 1995년에 마무리된 판타지 대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미래는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는 내레이션으로 유명하다. 페르시아 인근에 존재한 가상의 왕국 아르미안은 초대 여왕 이래 대대로 여성만이 왕위에 오르는 나라다. 아르미안 왕가에는 마누아, 스와르다, 아스파샤, 샤르휘나 네 딸이 있다. 왕위를 계승한 첫째 마누아가 막내 샤르휘나를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될 존재로 생각해 왕국에서 추방한다. 사막으로 쫓겨나 자신의 앞날을 보게 된 샤르휘나는 자신의 운명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게 된다고 절규한다. 그때 바다의 여신 리아나가 샤르휘나에게 말한다. “너의 일은 스스로 이겨 나가는 수밖에 없다. 미래가 그렇다면 그대는 미래를 바꾸어라.” 그렇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여성 독자들에게 선언한다. 주어진 현실이 답답하더라도, 미래는 예측할 수 없으니 네가 삶의 주체가 돼 세상에 도전하라고.

여성을 역사의 주연으로

신일숙은 1984년 ‘라이언의 왕녀’로 데뷔한다. ‘라이언의 왕녀’에서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냉정하고 능력 있는 여왕 마누아의 프로토 타입을 선보인다. 스코틀랜드 렌토랜드의 왕녀 라이아나는 평민들의 축제에 나와 춤을 추다 괴한의 습격을 받지만 낯선 이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라이아나는 괴한을 죽이지 않고 용서해 준다. 5년 뒤 17세 생일에 다시 평민들의 축제에 참여하고, 자신을 해치려 한 괴한을 만난다. 함께 간 약혼자 마린이 괴한을 발견하고 칼을 뽑지만 라이아나는 오히려 그를 자기편으로 만든다. “군주가 자기의 백성을 피하다니 그러고야 어떻게 군주일 수 있어? 난 안 피해.”

이후 라이아나는 바이킹 데인의 습격을 받아 위험에 빠진 스코틀랜드 렌토랜드 왕가의 계승자로 사랑보다 국가와 영토를 선택한다. 위기에 빠져도 절망하지 않는 라이아나는 “모든 운명을 거부한다”고 선언하며 마침내 자신의 왕관을 되찾아 온다. 데뷔작에서부터 자기 삶의 주인으로 운명과 맞서 싸우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신일숙은 할리퀸 로맨스 소설을 각색해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 버린 ‘사랑의 아테네’를 1985년 발표하고, 1986년부터 우리나라 만화사에 남을 장편 대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1986년 시작으로 1995년에 마무리된 ‘대작’이다. 작품 창작에 들어간 10여년의 시간과 서점용 단행본 14권의 분량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패치워크처럼 촘촘하게 이어간 서사 규모에서도 그렇다. 중심인물인 ‘아르미안 왕가의 네 딸들’이 다양한 인물과 연결되며 역사·정치·신화 서사가 다채롭게 직조돼 있었다. 무엇보다 여주인공이 서사 중심에서 단 한 번도 비켜나지 않았을뿐더러 당대에 익숙한 젠더 관습을 무시했다.

아르미안의 여왕이 된 첫째 마누아는 ‘라이언의 왕녀’의 주인공 라이아나처럼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아르미안의 부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 주요 남성 주인공인 리할은 운명적인 사랑에 이끌린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는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사랑밖에 모르는’ 여성 주인공은 없다. 대신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 아르미안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는 여왕 마누아가 있고, 파괴의 신이자 전쟁의 신인 에일레스와 전사로 교감하며 운명의 상대가 된 여전사 샤르휘나가 있다. 그렇게 신일숙은 1980년대 당시 일반적인 대중들의 시각인 ‘순정만화=사랑 이야기’라는 공식을 통쾌하게 깨버리는 동시에 여성을 역사와 서사의 주연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익숙함’으로 고정관념 뒤집기

많은 독자는 신일숙의 만화를 통해 신파를 벗어난 새로운 여성 이야기와 만났다. 1980년대 만화방 만화의 부흥은 자연스럽게 만화잡지의 창간으로 이어졌고, 신일숙도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창작하며 동시에 중단편 만화를 여러 잡지에 연재했다. 최초의 여성만화 전문잡지 ‘르네상스’에 1988년 11월호부터 연재된 ‘1999년생’에서는 미래의 여전사를 탄생시켰다.

21세기 지구는 원반인(외계인)의 공격으로 황폐해졌다. 원반인에게 당하기만 하던 인류는 원반인이 지구인의 초능력 공격에 취약하다는 걸 알게 된다. 세기말에 태어난 1999년생들은 유달리 초능력자들이 많았고 이들이 성장하자 인류는 드디어 원반인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됐다는 설정이다. ‘1999년생’에 등장하는 주인공 크리스는 뛰어난 초능력자로 초능력자 부대를 이끄는 대장으로 일한다. 작품 초반에 크리스는 원반에 침입해 원반인들과 싸운다. 원반인 대장은 대결을 암시한 후 사라진다. 그 뒤 원반인 대장은 나오지 않고 남성 기피증이 있던 크리스와 로페스 교관이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가 시작된다. 화두처럼 던진 대결 키워드는 결말 부분에 이르러 등장한다. 지구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 여전사 크리스가 사랑한 로페스 교관이 원반인들이 침투시킨 사이보그였던 것. 달콤한 로맨스가 숨겨진 덫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이처럼 신일숙은 독자들에게 익숙한 캐릭터와 이야기, 장르를 통해 고정관념을 뒤엎는 전략을 보여줬다. 이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만화는 1993년에 연재된 ‘나의 이브’다. ‘나의 이브’는 창세기를 새롭게 해석한다. 야훼는 고향을 떠난 천재과학자다. 그는 지구를 발견하고 낙원 도시를 건설하고 혼자 살아간다. 혼자 살기에 지친 야훼는 자신의 클론인 아담을 만든다. 아담이 나이를 먹으며 육체가 두드러지게 성장하자 실망한 야훼는 아담을 이용해 여자인 이브를 만든다. 이브는 아담과 달리 총명했으며, 모든 것을 배우고 싶어했고 상대방에게 사랑받는 법을 알았다.

이브를 사랑하게 된 야훼는 아담을 내쫓고 이브와 산다. 이브에게 아기를 갖게 해 주려고 새로운 클론을 만들려는 야훼에게 이브는 무엇을 하느냐고 따지고 들고, 야훼는 화가 나 인공 자궁을 보여준다. 야훼는 이브를 통해 또 다른 클론을 만들려고 하고, 그것을 알게 된 이브는 인공 자궁을 비롯한 컴퓨터를 모두 부순다. 이처럼 신일숙은 창세기 원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복시켜버렸다. 창세기 원전의 자신의 죄를 뱀에게 돌리는 이브 대신 자신의 창조자인 야훼에게 고통을 주는 당당한 이브를 그린다.

‘라이언의 왕녀’ ‘아르미안의 네 딸들’ ‘1999년생’ ‘나의 이브’에서 보여준 전복적인 서사는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늘 여전사만 그린 건 아니다. 신일숙은 다양한 장르 서사에도 능숙했다. ‘리니지’에서는 중세 판타지 액션을 그렸고, ‘카르마’에서는 미스터리를 능숙하게 풀어냈다. ‘파라오의 연인’은 고대 이집트와 현대를 오가는 SF이며, ‘프쉬케’는 그리스 신화를, ‘에시리자르’는 아라비안나이트를 재해석했다. 그리고 2017년 4월부터 카카오페이지에 거대한 우주 판타지 ‘카야’를 연재하고 있다. 신일숙은 ‘아라비안 나이트’를 제외하면 그동안 연재한 모든 작품을 완결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신일숙은 1980년대 중반부터 2020년 현재까지 2000년대 후반 부상으로 잠시 쉰 기간을 제외하면 쉼 없이 만화의 산을 올랐다. 그리고 신일숙이 쌓아 올린 여성 서사의 산은 많은 독자와 후배 작가들에게 멋진 길라잡이가 됐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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