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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언니’ 박영숙이 돌아왔다… 80세에 갤러리 접고 사진작가로 복귀

입력 2020-04-12 22:05:01
박영숙 작가가 지난 8일 개인전 ‘그림자의 눈물’이 열리고 있는 서울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그림자의 눈물 6’. (2019년 작, C-프린트).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깊고 푸른 숲. 이끼가 가득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을 것 같은 사진 속의 검푸른 숲속에 놀랍게도 흰색의 드레스와 이불 시트, 식탁이 놓여 있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위에는 립스틱, 분첩 등이 가지런하다. 여인이 살았던 흔적이다. 그런데 그녀가 마녀라면.

‘왕언니’가 돌아왔다. 1세대 페미니즘 사진작가 박영숙(79)씨. 1992년부터 윤석남 김인순 등과 함께 민중미술 운동 계열인 여성미술연구회에서 활동하며 한국 페미니즘 미술 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던 그였다. 2007년 국내 최초로 사진 전문 갤러리인 트렁크갤러리를 차리고 표표히 떠났던 그가 13년 만에 본업으로 돌아와 서울 종로구 삼청로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그림자의 눈물’전을 갖고 있다. 사진의 무대는 제주 곶자왈이다.

“중세 유럽에서 마녀들이 화형을 당했지요. 마녀는 가부장 사회의 희생양이었어요. 그들이 모두 화형 당했을까, 일부는 배를 타고 도망치지 않았을까, 하멜처럼 표류해 제주에 정착하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해봤어요.”

8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팔순이 믿기지 않는 에너지를 뿜으면서 말했다. 짧은 커트 머리에 보라색 부분 염색. 나이가 가늠되지 않는 태도에선 다시 작가로 돌아온 기쁨이 넘쳐났다. 2017년 초봄부터 지난해 늦여름까지 2년간 보름마다 제주를 찾아가 작업한 결과물이다. 이번 작업은 전작들과 결이 다르다. 과거엔 도발적인 여성 초상 사진을 통해 가부장제 사회를 고발했다. 박 작가의 브랜드가 된 ‘미친년 프로젝트’ 등이 그랬다.

이번 작품에선 인물이 부재하다. 마녀는 없지만, 마녀가 살았던 흔적은 사진 속에서 또렷하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드내기에 시적인 여운을 남긴다. 숲의 푸른색과 물건들의 흰색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마녀의 존재감을 더 강렬하게 전한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마녀는 왜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숲속에 와서야 평화를 얻었을까. 그것은 패배가 아닐까.

“인적도 없고 소름이 돋는 듯 오싹한 곳입니다. 그런 곳이 내게는 영적인 장소로 느껴졌고, 마녀들을 환영하며 서로가 서로를 흡족해하며 어우러져 간다고 느꼈어요.”

남성 위주 사회에서 희생된 여성들을 극단적으로 형상화한 미친년 프로젝트가 피해를 부각시킴으로써 직접적인 도전을 했다면, 이번 곶자왈 마녀 시리즈에선 ‘여인들의 왕국’을 건설함으로써 간접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이곳에서 그녀들은 자신들의 여성성을 온전히 드러낸다. 하늘하늘한 커튼, 부서질 것 같은 구슬, 바르다만 립스틱 등은 예쁘면서도 연약하다. 도저히 마녀의 물건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남성 사회가 덧씌운 마녀 프레임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있다.

박 작가는 대학에서 사진동아리를 한 1960년대 초부터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1초도 사진과 멀어진 적이 없었다”는 그가 갤러리스트로 변신했던 것은 고루한 한국의 사진 시장에 변화를 가져오고 싶다는 소명 의식 때문이었다. 한국 사진계는 원로 남성 사진작가들이 장악한 다큐멘터리 사진이 대세였다. 그 견고한 아성을 뛰어넘어 순수 예술사진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어 갤러리를 연 것이다. 빚까지 안아가며 김미루 백찬효 데비한 등 70여 명 사진작가들의 실험적인 작업을 소개했다.

문제는 그러는 와중에도 작가로서의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품 하고 싶어 자주 울었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날려버리는 건 견디기 어려웠다”는 그에게 기회가 왔다. 바로 옆 아라리오갤러리의 김창일 회장이 박 작가의 과거 사진 작품을 눈여겨보고 전속 작가를 제의해 온 것이다. ‘팔십, 너무 늦은 건 아닌가요’라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나이 의식하며 산 적이 없어요. 지금 팔십이라는 것도 잘 몰라요.”(웃음). 6월 6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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