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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예술가를 지키는 방법

입력 2020-04-17 04:05:01


얼마 전 우리 회사는 예술가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코로나19 대응책으로 정부에서 마련한 예술가 융자지원을 살펴보니 준비해야 할 서류도 많고, 젊은 예술가들이 이용하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예술가들의 생활은 코로나19 초기부터 바로 어려워졌다. 미술학원이나 지역아동센터에서 가르치는 일도 중단됐고, 예정된 전시들도 취소됐다. 우리도 예정된 일들이 보류되거나 취소되고 있었지만 사회적기업보다 예술가를 지켜내는 장치들이 더 약하다고 생각돼 ‘펀드A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00만원 또는 200만원을 이자 없이, 이유 없이, 서류 없이 신속하게 빌려주는 이 프로젝트는 이틀 만에 준비한 2000만원을 소진했다. 온라인상에서 몇 가지 정보만 입력하면 신청이 되고, 전자 계약서를 작성하면 바로 입금되도록 했다. 간단한 절차 때문인지 소액을 빌려주었을 뿐인데 작품을 팔았을 때보다 고맙다는 인사를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200만원을 빌릴 수 있는데도 다른 예술가를 위해 100만원만 신청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은 돈을 빌리지 않으면서 고맙다고 메일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며, 조금이라도 보태 달라며 입금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미 얻은 것이 더 많은 프로젝트가 됐다.

일을 하면서 늘 예술가, 사회적기업가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의사결정의 우선순위가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돈도 많이 벌면 좋겠다는 생각은 다들 해보겠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도 지금 하는 일을 기꺼이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각자의 관심사와 미션이 있다. 사회적기업가는 정부나 일반 기업이 해결하기 힘든 사회문제들에 도전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탈학교 청소년의 미래를 걱정하고, 환경과 멸종위기 동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곳곳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일한다. 예술가는 시대를 관찰하고 공감하며 외롭고 힘든 사람들의 마음에 위안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예술가와 사회적기업가는 우리 사회에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시장경제의 논리대로 작동되지 않는 영역에 있다 보니 투자를 받기도 어렵고, 열정과 노력에 비해 경제적 보상이 크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정부의 지원과 육성이 필요한 이유다.

사실 사회적기업의 육성과 지원은 사회적기업진흥원을 중심으로, 짧은 역사에 비해 효율성과 체계를 잡아가며 확산돼 왔다. 나 또한 사회적기업가로 9년을 지나오는 동안 소셜벤처경연대회, 사회적기업가육성사업 등 창업 단계에 맞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도움을 받았다. SK도 사회적기업가를 위한 교육과 사업 기회를 제공했고, 사회적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측정해 인센티브도 지급하고 있다.

물론 사회적기업에 대한 정부나 기업의 지원은 일자리 창출을 중심으로 여러 기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예술가를 위한 제도에는 늘 아쉬움을 느꼈다.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더 많은 예술가를 육성하고, 파격적으로 지원하고, 미술 시장도 적극적으로 열어볼 수는 없을까. 사회적기업의 판로를 지원하듯 예술가의 작품도 나서서 팔아줄 수는 없을까.

그동안에도 예술가의 창작 지원과 전시 지원은 있었지만 그 이전과 이후의 단계가 없다. 예술가가 되고 싶은 재능 있는 신진들을 키우는 제도와 예술가가 활동을 지속하도록 해줄 시장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가격 상한선은 있어야 하겠지만 공공기관이 먼저 지역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고,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살 때는 소득공제를 해주면 어떨까. 영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민이 미술작품을 살 때 무이자로 대출을 해주는 오운아트론(own art loan)이라는 제도를 시행 중이다.

예술의 중요성과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예술가를 지켜야 한다. 내가 예술가를 위한 사회적기업을 계속해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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