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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교육·선교 ‘대이은 헌신’… 우리암·광복 부자 아십니까

입력 2021-11-12 03:10:02
미국 북감리회 공주선교부 설립 학교인 영명학교 후신 영명 중·고등학교 교정. 교정 흉상은 이 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황인식 조병옥 유관순(왼쪽부터)이다.



 
우광복(조지 윌리엄스)의 가족. 오른쪽 소녀가 공주 영명동산에 묻힌 동생 올리브이다.
 
트럼펫을 연주하는 우광복과 이승만 대통령.
 
영명동산에 있는 옛 선교사 주택.


한국의 독립과 교육에 헌신하고 복음을 전파한 우리암(禹利岩, Franklin E. C. Williams, 1883~1962) 우광복(禹光福, George Z. Williams, 1907~1994) 선교사 부자(父子) 기념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암·우광복 선교사기념사업회(회장 노시청)는 충남 공주 옥릉동 산34 일대 ‘영명동산 기독교선교 유적 정비 설계’ 아이디어 공모를 냈다. 사업회는 내년 12월까지 우리암 우광복 후손 찾기 및 초청 행사, 선교사 묘역 정비, 후손 초청 8·15 광복절 행사를 가질 계획이다. 또 2023년 1월부터 선교유적 순례자의 길 정비, 우리암 우광복 선교사 독립 유공자 추서, 특집 방송 및 영화 제작을 추진한다.

사업회는 최근 공주 영명학교에서 (사)한국선교유적연구회(회장 서만철)와 (학)감리교 영명학원(이사장 표용은),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충남연합회(회장 강성민), 공주CBMC(회장 박용서), 의정부CBMC(회장 이성복)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들 단체는 한국 선교에 평생을 바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한 우리암 우광복 선교사 기념사업과 선교유적에 대한 홍보와 활용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의정부CBMC 이성복 회장은 11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의정부 CBMC 회원들이 우리암 우광복 부자의 아름다운 선교 이야기를 듣고 공주 영명학원을 답사했으며 이들 부자의 정신과 뜻을 이어받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이제 그들이 이 땅에 전한 복음 전도와 교육과 섬김, 헌신을 전 세계를 향해 우리가 하는 것이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서만철(전 공주대 총장) 회장은 “교계 의견 및 관련 전문가와 긴밀한 협력을 통해 우수한 설계자에게 설계를 의뢰해 다시 오고 싶은 선교유적으로 재탄생시킬 계획이다. 다른 선교 유적지와 함께 유네스코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암 선교사는 미국 덴버대를 졸업하고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해외 선교지원자 학생운동에 참여한 것이 계기였다. 1906년 여름 부인 우애리시(禹愛理施, Alice B. Williams)와 함께 내한한 그는 곧바로 공주로 파송됐다. 이후 1940년 강제 추방될 때까지 34년간 공주를 비롯한 충남 지역의 교육 및 선교 사업을 전개했다.

한국에서 첫아들을 낳은 부부는 아들의 한국식 이름을 대한민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우광복’으로 지었다. 그리고 딸 올리브를 낳았다. 첫 사역은 문을 닫았던 명설학당을 영명학교(현 영명 중·고등학교)로 새롭게 개교하는 것이었다. 그는 영명학교 교장(초대, 2대)을 맡아 인재를 양성했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열사 유관순, 독립운동가 조병옥, 초대 충남도지사 황인식 등이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 선교사로 파송됐다. 그곳에서 광복군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영국군과 함께 대일 항전을 전개하는 등 통역관으로 활약했다. 광복 후 한국에 미 군정 농업정책 고문관으로 입국해 농업발전 및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우광복의 여동생 올리브는 풍토병에 걸려 8세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고 공주 땅 영명동산에 묻혔다.

한국에서 태어나 초·중학교를 마친 우광복은 할아버지가 사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 중에 한국의 광복 소식을 듣고 군의관으로 자원한 것이다.

때는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돼 하지 장군이 군정관으로 한국을 신탁통치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미 군정은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구사할 사람이 필요했고, 마침 우광복이 그 역할을 맡아 하지 장군의 통역관으로 정부수립에 관여했다. 당시 하지 장군은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광복은 50명을 하지 장군에게 추천했다. 추천자 중 35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서 회장은 “해방 후 이념 대립으로 혼란한 정국에서 이 땅에 자유민주국가를 수립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숨은 공로자”며 “우광복이 추천한 이들은 한국 정부수립 때 요소요소에 들어가 나라를 세우는 데 공헌했다. 미신 타파를 시작했고, 군목제도의 토대를 마련해 군 정신력 강화에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1994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우광복의 유해는 동생 올리브가 묻혀 있는 공주 영명동산에 안장됐다. 그의 유언대로였다.

공주=글·사진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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