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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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세상속으로…] 평소엔 청소년 사랑방, 매주 한번은 독거 중년남의 부엌으로

입력 2022-07-20 03:10:01
서울 강서구 내 중년 독거 남성들이 최근 사랑의교회(최석진 목사) 쿠킹 스튜디오에 모여 건강한 반찬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건물 입구엔 교회 이름과 함께 ‘청소년 카페’ ‘자살예방센터’ 등 현판이 나란히 부착돼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최석진 목사가 각각의 현판을 소개하는 모습. 신석현 포토그래퍼


“여러분, 오늘은 저염 겉절이를 같이 만들어 볼 거예요. 조금 전에 잘 썰어 둔 배춧잎에 10대 1 비율로 고춧가루를 넣으면 됩니다. 몇 대 몇?”(김남희 영양사) “10대 1!”(참석자들)

최근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상가 3층에 들어서자 성인 10여명이 모인 쿠킹 스튜디오에서 요리 강습이 한창이었다. 벽면 한 편엔 ‘마음을 나누는 건강밥상’이란 제목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4년 전부터 ‘건강밥상 셰프’로 봉사하고 있는 김남희(48) 서울식생활지원센터 영양사는 “영양 불균형 문제를 안고 사는 지역 내 독거 남성들에게 스스로 건강한 반찬 만드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매주 한 번씩 이곳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주방에선 대추 황기 오가피 등 각종 한약재를 넣은 육수가 삼계탕으로 변신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닭고기를 손질하던 김정님(63) 화곡6동 부녀회장은 “여럿이 같이 요리하다 보면 명절 때 식구들이 모여서 음식 준비하는 정겨운 느낌이 든다”며 웃었다. 3년째 건강밥상을 위해 봉사 중인 그는 “여기 오려고 전날 술도 안 마신다는 얘기, 혼자 살면서 대화할 기회가 없는데 위로도 나누게 됐다는 얘기를 해주실 땐 말로 다 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들이 모인 쿠킹 스튜디오는 지역 내 보건소가 독거 남성들의 영양 상태 개선과 우울감 해소 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사랑의교회(최석진 목사)에 협조를 요청한 공간이다. 이곳에 오면 매주 한 차례 든든한 요리로 끼니를 챙기고 일주일간 집에서 챙겨 먹을 수 있는 건강한 반찬을 손수 만들어 가져갈 수 있다. 요리 강습 후엔 당뇨 혈압 등 건강 상태도 확인하고 최석진(47) 목사와 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최 목사는 “작은 공동체이지만 ‘이웃에게 필요하고 사랑을 줄 수 있는 공동체로 세워나가자’는 목회 첫 단추를 잊지 않은 게 오늘의 사랑의교회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최 목사가 10년 전 이곳에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교회는 다른 미자립 상가교회 상황과 다를 바 없었다. 4년 차에 접어들던 어느 날 교회의 한 권사가 최 목사에게 “목사님, 우리 동네에 아이들이 마음 놓고 컵라면 하나 먹을 곳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전한 얘기가 가슴에 박혔다. 다음 날 직접 동네 편의점에 가 지켜봤더니 공간도 좁고 근처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도 많아 한눈에도 상황이 열악해 보였다.

“그날로 예배당 뒤편 공간을 분리하고 학생들이 컵라면을 먹고 갈 수 있도록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했어요. 초반엔 한두 명이 와서 먹고 가는 정도였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방과 후에 들르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졌지요. 하루에 라면 서너 상자가 필요할 정도였으니까요.”

어린이 포함 성도 30여명의 공동체였지만 사랑의교회의 ‘라면 창고’가 비는 날은 없었다. ‘라면 통장’ 덕분이다. 성도들 사이에 ‘학생들을 위한 청소년 카페 사역은 멈추지 말자’는 공감대가 확산하면서 자발적으로 통장 하나가 만들어졌고 이 사역에 동참하겠다고 나선 동네 주민, 타교회 성도들도 힘을 보탰다. 몇 개월 후 아이들에게 더욱 쾌적한 환경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모아지면서 만들어진 게 쿠킹 스튜디오다.

지난해 2월부터는 매주 한 차례 중독자 회복 자조 모임 장소로도 쓰이고 있다. 공주치료감호소 내 회복 모임을 주관하던 한 성도와 인연이 닿으면서 마약 알코올 도박 등 중독을 경험한 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최 목사는 “결국 모든 것의 키워드는 ‘사랑’이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공공기관과 협력, 생명지킴이로

최석진 사랑의교회 목사가 말하는 목회의 핵심은 ‘사랑을 전하기 위한 준비’에 있다. 그는 성도 10여명 수준의 가정교회와 다름없던 시절, ‘생명’에 대한 관심을 갖고 게이트 키퍼 교육을 이수했다. 그 후 기독교자살예방센터 라이프호프(대표 조성돈 목사) 강서지회 자살 예방 생명 지킴이로 활동하며 지역 내 초중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최 목사는 “이 과정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준비 기간”이라고 했다.

생명지킴이로서 동네 학생들의 일상과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었던 것, 자살 고위험군에 해당하는 중년 독거 남성을 대상으로 지원프로그램을 모색하던 보건소가 도움을 요청해 온 것, 중독자들의 회복을 위한 모임 공간으로 예배당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 모두 ‘어떻게 하면 생명을 지키고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준비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교회와 목회자에게 의지가 있어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정보를 알기 위해선 공공기관의 협조가 필요해요. 하지만 쉽지 않죠. 공공기관이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을 때 교회가 작더라도 거기에 적합한 환경과 사람을 준비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이 느끼는 기쁨은 상상 이상이에요.”

사랑의교회가 위치한 동네 주변엔 이곳보다 더 크고 쾌적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중대형교회도 여럿이다. 하지만 더 큰 공간에 놓인 더 큰 십자가는 공공기관에도, 쉼과 회복을 위해 공간을 찾는 이들에게도 심리적 장벽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낡은 건물의 3층 계단을 내려와 바라본 좁은 입구가 최 목사를 만나러 들어갈 때에 비해 훨씬 넓게 느껴졌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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