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를 하며 머리가 무섭게 빠졌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면 ‘스르르’하고 손가락 사이에 머리카락이 가득 끼여 딸려 나왔다. 결국 머리를 밀기로 했다. 머리를 밀기 전날 딸 동주가 예쁘게(?) 사진을 찍어줬다. 딸은 “머리를 잘라도 엄마는 예뻐”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랑하는 나의 딸, 고마운 나의 딸, 동주는 나와 많이 다르다. 쿨하고 무심한 성격이 가끔은 답답하고 조바심 나게 했지만 잘 자라주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동주도 인생의 어려움을 같이 겪었는데, 그래서인지 우리는 어느 모녀보다 서로를 잘 이해했다. 이혼 직후 동주가 많은 도움을 줬다. 동주는 엄마의 손을 잡으며 용기를 줬다. 어릴 때부터 혼자 미국 유학 생활을 한 동주는 처음 혼자가 된 내게 큰 힘이 됐다. 그동안 너무 작은 세계에 머물렀으니 이제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라고 했다. 딸이 한국에 돌아와 나의 홀로서기를 도와주니 인생의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는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같다.
좋은 소식이 들리면 나쁜 소식도 어느새 슬그머니 들이닥친다. 인생의 굴곡이 있을 때마다 힘들고 버거웠다. 하지만 그 덕에 내 옆에 동주가 있다는 것에 더 감사하다. 별일 없이 평탄한 시간이었다면 동주의 존재도 당연하게만 생각하고 감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끔 내 눈물을 닦아주는 동주에게 늘 미안하다.
“엄마, 내가 잘 할게. 건강하기만 해.” 따뜻한 딸의 말에 내려놨던 희망을 다시 등에 업고 거친 인생을 걷는다. 아픈 중에 함께 하고, 고통을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딸 동주와 아들 종우 이야기도 더 할 생각이다.
어쨌든 나는 하나님과 딸 동주를 의지해 꿋꿋하게 세상에 버티고 서 있다. 두 존재가 든든한 기둥이 돼 준 덕에 흔들리지 않는다.
가끔 궁금하다. 세상 사람은 무슨 배짱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일까. 만약 주님을 믿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렸을 것이다. 세상적으로는 동주가,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더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나를 꽉 잡아주고 있다. 누구에게나 믿을 수 있는 기둥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차피 죽기까지,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두 맡아 주시니까.
수술대에 오르는 날 온몸에 마취가 퍼지기 전, 눈을 감고 찬송 ‘저 장미꽃 위의 이슬’을 불렀다. 속으로 부르고 있었지만 내 귀엔 청아한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수술하는 동안 육신은 잠들 것이다. 하지만 정신 만큼은 찬송가 가사처럼 주님을 만나 동산을 걷기로 했다. 오직 주님과 나 둘만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싶었다.
“주님 제 손을 잡아 주세요. 잠이 와요. 저와 함께 동산을 거닐어 주세요.”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동주가 앞에 와 있었다. 내 든든한 기둥 동주. 나도 동주에게 그런 기둥일까. 지금까지 그렇지 못했다면 앞으로라도 주님과 함께 나도 동주에게 기둥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