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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엘 시스테마’아이들의 반독재 투쟁

입력 2017-05-01 05:05:04



최근 내한공연을 가진 가브리엘라 몬테로(본보 4월 24일 보도)는 남다른 정치적 행보로 주목받는 베네수엘라 출신 피아니스트다. 그녀는 조국의 현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한 대가로 6년 넘게 귀국하지 못하고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망명 이후에도 침묵하지 않고 국제 엠네스티 명예 인권대사로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체제 아래 신음하는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고발했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가 서울 공연에서 마지막으로 연주한 작품 ‘베네수엘라를 위하여’는 내전의 위기에 휩싸인 조국을 위해 직접 쓴 자작곡이었다. 몬테로가 조국을 위해 쓴 작품은 2011년 음반으로 발표된 피아노 협주곡 ‘옛 조국(Ex Patria)’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이 작품을 그 해 범죄와 정권의 폭력으로 사망한 1만9336명의 베네수엘라 희생자에게 헌정했다.

몬테로의 적극적 예술적 저항 운동에 이어 미국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합류했다. 최근 베네수엘라에서 반정부 시위가 한 달 째 이어지면서 서른 명 이상이 시위 도중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다멜은 27일 소셜 미디어를 통해 “민주주의 방식대로 국민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라”는 메시지를 베네수엘라 정부에 전했다. 사실상 시민들의 대통령 퇴진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이다.

몬테로와 두다멜의 이러한 행보에 사실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베네수엘라 정부일 것이다. 이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국제적 스타로 성장한 베네수엘라 아티스트들이다. 스스로 ‘빈민의 챔피언’이라 부른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석유산업을 국유화하여 벌어들인 정부 수입을 국내 복지정책에 쏟아 부었다. ‘포퓰리즘’의 원조라 볼 수 있는 그의 복지정책은 빈민 아동들을 위한 거국적 무상 음악 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에까지 이르렀다.

마약이 창궐하는 뒷골목의 빈민 아동들이 무상 음악교육을 받고 번듯한 시민으로 성장한 ‘엘 시스테마’의 성공사례는 전 세계 문화예술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만 해도 이명박정권 시절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복지부가 각각 수십억 원의 예산으로 ‘엘 시스테마’를 모방한 음악교육 프로그램을 추진했을 정도다.

몬테로는 오케스트라 진흥 시스템인 ‘엘 시스테마’에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국비 장학금으로 어린 시절 미국으로 유학하여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엘 시스테마 산하 단체인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연하며 자랐다. 두다멜 또한 세계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로 성장한 ‘엘 시스테마’가 배출한 최고의 수퍼스타다. 두다멜이 이끄는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는 세계 어디에서나 환영받았으며 이들의 세계적 명성은 서방세계와 반목하던 차베스 좌파 정권의 문화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듯 정권의 자부심이었던 ‘엘 시스테마’의 아이들이 자신들에게 칼을 겨누는 자충수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몬테로와 두다멜, 그리고 ‘엘 시스테마’의 예술적 성취는 차베스 정권을 다시 돌아보게 할 만큼 강력했다. 이들의 반정부 행보는 다시 세계 문화계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마두로 독재정권에 압박을 가할 것이다. 자신의 출생의 근원을 부정하는 딜레마 속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윤리를 선택한 그들의 용기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들 덕분에 클래식 음악은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를 얻었다.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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