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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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문화정책

입력 2017-05-15 05:05:04



대통령 선거일 하루 전날 은수미 전 국회의원의 트위터 글로 온라인이 잠시 들썩였다. 내한 예정인 해외 악단 티켓 가격과 관련된 기사를 언급하며 그녀는 ‘구조적 문제라지만… 살기도 힘든데 웬 음악이냐구요. 일단 접어두고 기호 1번 문재인’라고 적었다.

이 뜬금없는 글에 음악 애호가들은 “사치스런 한량으로 매도됐다”며 격앙됐다. 비난이 봇물치자 은의원은 자신의 말이 와전됐다며 “(본인이) 이 티켓을 살까 고민할 터라서 ‘먹고 살기 힘든데 웬 음악이냐’는 비난을 받을 거란 내용”이라고 뒤늦게 해명한 뒤 문제의 글을 삭제했다.

100자도 안 되는 그의 짧은 글에는 현 한국 공연예술계의 현실이 고스란히 압축돼 있다. 한국 공연계가 위축되어 있는 이유가 말 그대로 ‘먹고 살기 바빠서’이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소득이 늘면 제품의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인 ‘소득탄력성’은 생필품일수록 그 수치가 낮고 사치품일수록 크다.

통념상 과시적 소비 제품으로 간주되는 공연예술은 당연히 탄력성이 높을 것 같지만 예상과 달리 생필품만큼 낮다. 이와 관련해 스웨덴 경제학자 스타판 린데르는 공연예술 소비를 위해서는 소득과 아울러 시간의 지출이 요구되는 점을 지적했다. 이처럼 소득수준이 올라갈수록 경제활동 시간이 길어져 공연예술 소비가 줄어드는 현상을 그의 이름을 따 ‘린데르 효과’라 부른다.

한국 공연계도 린데르 효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동안 한국 문화예술향유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개인의 문화예술향유 활동의 걸림돌로 비용부담과 시간부족이 가장 많이 지적됐다. 지난해엔 10대부터 50대까지 연령층 모두 행사 내용 및 수준을 관람선택기준으로 꼽았다. 이 통계가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다. 첫째, 국민들의 문화적 안목과 수준이 현저하게 향상했다는 것.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돈이 없어 향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계 OECD 연평균 근로시간이 1770시간인 반면 한국은 2285시간으로 515시간 더 많다. 한국인들은 연평균 일본인보다는 2개월, 독일인보다는 무려 4개월 이상 더 오래 일하고 있다. 공연계 주변을 보면 이런 상황이 실제로 체감된다. 취직과 결혼, 출산 등의 경사는 공연계 입장에서는 단골관객의 상실과 맞닿아 있다. 갑작스런 야근 때문에, 아이를 맡길 곳을 찾지 못해 기껏 사놓은 티켓을 취소하는 관객들이 이를 증명한다.

고가의 티켓은 잠재적 관객 수를 현실화하지 못하는 이러한 상황 때문에 발생한다. 관객이 충분히 확보되어 공연 횟수를 늘이면 티켓 가격은 당연히 내려간다. 즉 공연계 활성화는 문화정책만이 아니라 노동정책(근로시간 단축), 여성가족정책(육아시설확충), 복지정책(소득분배)과 유기적으로 연동한다. 이는 공연계만이 아니라 한국 문화예술계 전체에 적용되는 현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자리 대통령’을 천명했다. 문 대통령이 일자리의 증가와 함께 부디 그 일자리의 ‘근무 여건’도 함께 고려하길 바란다. 도처에서 발생하는 과로사, 자살, 우울증 등의 산업재해는 지금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 또한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영향이 문화예술계 전반에 미치고 있다. 실업자에게는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 물론 밥을 못 먹으면 굶어 죽는다. 하지만 영화 ‘싱글스’에서 엄정화는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식중독으로 죽는다고 했다. 극소수의 금수저들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은 굶주린 자와 식중독 환자들, 이 두 부류로 가득 차 있다.

글=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삽화=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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