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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금미의 시네마 패스워드-이란 영화 ‘세일즈맨’] 무너지거나 무너뜨리거나

입력 2017-05-21 20:45:01



어느 늦은 저녁, 아파트에 소동이 일어난다. 건물이 붕괴될 우려가 있으니 얼른 대피하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건물 벽에 바짝 붙은 신축 공사장에서 포크레인은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30대 젊은 부부는 당장 갈 곳이 없다. 11일 개봉한 이란 영화 ‘세일즈맨’ 이야기다.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끊임없이 부수고 새로 짓는 어수선한 개발 열풍 속에서 주거난이 극심한 테헤란을 배경으로 무너져가는 중산층 부부의 삶을 그린다.

고등학교 문학교사인 에마드는 아내 라나와 함께 연극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건물에서 빠져나왔지만 새집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 극단 동료의 도움으로 겨우 구한 집은 상태가 엉망이다. 이전 세입자가 맡겨두고 간 짐까지 잔뜩 쌓여있다.

이사 직후 어느 날, 부부의 삶에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킬 사건이 일어난다. 연극 공연을 마치고 밤 늦게 귀가한 라나가 곧 도착할 남편을 기다리며 문을 열어두었다가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 것.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어서 치료를 받고 귀가할 수 있었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공포와 불안을 겪게 된다.

이때부터 에마드는 범인이 떨어뜨리고 간 자동차 열쇠를 붙들고 복수를 위해 집요한 추적을 시작한다. 범인이 실수로 현장에 남기고 간 소지품 중에는 휴대전화도 있었다. 물론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서비스 중지로 먹통이 되어버린 상태였지만 말이다.

에마드는 왜 경찰에 신고해 도움을 청하지 않고 사적 처벌이라는 방식에 집착하는 걸까. “그럼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밝혀야 하잖아요. 내가 그 남자에게 문을 열어줬다고.” 늘 불안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라나에게 결국 에마드가 짜증을 참지 못하고 신고하러 가기를 권유하자 돌아온 대답이다.

“네가 뭔가 여지를 주었겠지.” “그러게 애초에 부주의한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지.” 사건의 피해자를 향해 무심히 던져지곤 하는 잔인한 비난의 말들이다. 특히 피해자가 약자일수록 이런 말들은 더 쉽게 쏟아져 내린다. 라나는 모욕적 상황에 의해 또 한 번 상처를 받느니 차라리 고통스러운 정신적 공황 상태를 감내하는 길을 택한다.

에마드가 범인을 찾아내는 일에 집착할수록 부부 사이의 관계는 두 사람이 함께 무대에 올리는 아서 밀러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속 부부의 모습이 그러하듯 점점 커져가는 균열을 맞게 된다. 영화감독으로 입문하기 전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던 파르하디 감독은 삶에 지친 고집스러운 가장의 모습을 통해 붕괴되어가는 미국 중산층 가정을 그려낸 ‘세일즈맨의 죽음’을 영화 속에 적절히 녹여낸다.

마침내 에마드는 자신이 살던 붕괴 직전의 아파트로 범인을 유인하는 데 성공한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건물 안 휑한 빈집에서 인물들이 펼치는 감정적 대결은 긴 호흡의 롱테이크 속에서 팽팽히 유지된다. 유난히 유리 벽이 많은 이 아파트 내부에서 부서질 듯한 인물의 심리는 더욱 강조된다.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은 각자의 진실을 품고 있다.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이 작품은 상처를 치유하는 진정한 방법에 대해 조용한 물음을 던진다.

여금미 <영화 칼럼니스트·영화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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