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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트렌드]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강경화스러운’ 그녀들

입력 2017-07-07 05:05:03
강경화 장관


우연히 찍힌 사진 덕에 모델로 데뷔한 60대 교수 린 슬레이터씨 화보.인스타그램


잡티를 가리지 않는 '최소한의 메이크업'으로 카메라 앞에 선 모델과 배우 니콜 키드먼, 페넬로페 크루즈(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보그·피렐리


앨리슨 킴미씨가 3월 말 페이스북에 올린 딸과 함께 찍은 사진. "튼 살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글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디스이즈뷰티' 홈페이지에 올라온 다양한 연령과 외모의 여성들.


최대한 가리는 게 미덕이었다. 희끗희끗한 새치를 자연스러운 갈색으로 염색하는 것, 핏기 없는 입술 색을 감추려 붉게 칠하는 것이 그랬다. 임신하거나 갑작스레 키가 자라 생긴 튼 살은 수영복 안에 숨기는 게 맞았다. 그랬던 미덕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숨기거나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멋지다고 평가한다. 이런 미적 기준이 아직 한국에선 대세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본래 모습을 가리는 염색과 화장을 한다. 그러나 새로운 경향은 분명 확산돼 가고 있고,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반가운 일이다.

SNS서 극찬 받은 ‘강경화 은발’

강경화(사진) 유엔사무총장 정책특별보좌관이 외교부 장관 후보자로 발표된 지난달 21일 소셜미디어에는 그의 ‘머리색’을 멋지다고 평가하는 글이 쏟아졌다. 흰머리가 뒤덮은 반백의 단발은 남녀노소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 흰머리를 가리는 데 급급했던 중년들은 놀라워했다.

흰머리는 분명한 단점이었다. 그러나 ‘강경화 은발’ 이후 이를 매력으로 여기는 이가 많아졌다. “억지로 꾸미지 않아 더 매력적”이라고 깨달은 이도, “나도 훗날 염색을 하지 않겠다”며 선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 장관은 과거 인터뷰에서 “본모습을 가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에게 ‘염색하지 않는 것’은 ‘외모를 가꾸지 않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장관 취임 이후 촬영된 사진만 봐도, 알이 굵은 진주목걸이를 색을 바꿔가며 목에 걸었고 치마와 바지 정장을 번갈아 입으며 멋을 냈다. 단지 흰머리를 가리지 않을 뿐이다.

미국에서는 백발 덕에 하루아침에 모델이 된 60대 여성도 있다. 린 슬레이터(63)씨는 인스타그램 팔로어 22만명을 거느린 현직 모델이다. 그는 “2년 전 패션쇼장 밖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패션 사진작가들이 나를 둘러싸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모델로 나서기 전까지 슬레이터씨는 뉴욕의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의 화보에 실린 패션의 화룡점정은 백발의 헤어스타일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늙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불과했던 그의 흰머리는 그 자연스러움 덕에 멋이 됐다.

주근깨도, 튼 살도… 그대로가 아름답다

유명 사진가와 모델을 섭외해 매년 달력을 제작하는 이탈리아 타이어업체 피렐리의 2017년 콘셉트는 ‘최소한의 메이크업’이나 다름없었다. 케이트 윈슬렛, 니콜 키드먼, 우마 서먼, 페넬로페 크루즈, 장쯔이 등 유명 여배우들이 화장을 거의 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섰다. 두꺼운 메이크업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기에 주근깨, 잡티, 주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세계 1억7500만명이 쓰는 소셜미디어 ‘핀터레스트’는 올해 최고의 뷰티 트렌드가 ‘최소한의 메이크업’이라고 분석했다. 화장기 없이 촬영한 사진을 핀터레스트 사용자들이 공유한 횟수가 전년 대비 250%나 상승했다고 최근 밝혔다. 일본 화장품 브랜드 RMK의 수석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소현씨는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색과 형태를 조금 더 나아 보이게 하는 화장법이 요즘 인기”라면서 “내 피부, 내 입술처럼 자연스럽지만 그보다 더 좋아 보이게 하는 MSBB(My Skin But Better)와 MLBB(My Lip But Better) 제품도 시중에 많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패션계에서는 수년 전부터 튼 살을 가리지 않는 ‘무보정’ 광고가 의미 있는 일로 평가됐다. 브랜드 이미지 캠페인에 주로 등장하던 이런 광고는 이제 실제 판매에 활용되고 있다. 최근 유럽 최대 패션몰 ‘아소스’는 튼 살을 보정하지 않은 수영복 모델 사진을 판매 사이트에 그대로 올려 소비자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옷을 사려고 사이트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우연히 튼 살을 발견한 이가 소셜미디어에 캡처 사진을 올렸고, 급속도로 공유됐다. “이런 광고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준다”는 긍정적 반응이 소셜미디어에서 줄을 이었다.

지난 3월에는 소셜미디어에 튼 살을 공개한 미국 엄마의 페이스북 사진이 18만건 이상 ‘좋아요’를 받았다. 튼 살이 드러나는 수영복을 당당히 입는다는 이 여성은 사진과 함께 딸과의 대화 내용을 소개했다. 딸에게 “튼 살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알려줬더니 설명을 다 들은 딸이 “난 언제쯤 튼 살이 생기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세계로 퍼지는 ‘내 몸 긍정주의’

가리지 않는 건 본모습을 그대로 사랑하자는 의미를 갖고 있다. 1996년 미국에서 시작된 ‘내 몸 긍정 운동(Body Positivity Movement)’이 대표적이다. 이 트렌드는 2012년 소셜미디어의 성장과 함께 세계로 퍼져 나갔다. 자신의 외모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 사랑하자, 단점이라고 인식돼 가리던 방식에서 벗어나자는 메시지를 전파한다.

미국 걸스카우트는 지난달 중순 외모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녀에게 해야 할 조언으로 ‘내 몸 긍정주의’를 꼽았다. “뚱뚱하다”며 자기 몸에 실망하는 딸에게 “뚱뚱하지 않다”고 위로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의 여성을 보여주라고 제안했다. 날씬함뿐 아니라 뚱뚱함, 똑똑함, 강함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연예인 말고도 과학자, 축구선수, 음악가 등 다양한 재능과 외모를 지닌 사람이 우상이 될 수 있다. 걸스카우트는 “아이는 그저 당신을 따라하는 것일 수 있다”면서 자녀에게 조언하기에 앞서 부모가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고 했다.

‘내 몸 긍정주의’ 운동본부가 운영하는 ‘디스이즈뷰티’ 사이트 첫 화면에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몸매의 사람들 사진이 올라 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몸에 착 달라붙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모습부터 살집이 제법 있는 여성이 민소매 옷차림에 열정적으로 춤추는 장면까지 그대로 실었다. 모든 사람이, 모든 형태의 외모가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준다.

가수들도 획일화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미국 래퍼 켄드릭 라마가 올해 초 발표한 곡 ‘험블’은 포토샵(사진 보정 프로그램)으로 보정한 것 말고 튼 살에 자연스러운 몸매를 보고 싶다는 가사를 담고 있다. 미국 가수 앨리샤 키스도 지난해 말 ‘잡티를 가리는 화장이 결국 사람의 자존감마저 덮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하는 노랫말을 직접 써서 불렀다.

한국 여학생 절반이 중학교 1학년 이전에 화장을 시작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최근 나왔다. 이들은 ‘자신감 상승’을 화장하는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일부는 “민낯에 자신이 없어 집 앞에 나갈 때도 화장한다”고 답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외모를 강조하는 사회의 강박 때문에 과도하게 치장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국 걸스카우트의 진단처럼 어른 세대가 추종하는 미의 기준이 미래 세대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말이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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