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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목숨을 건 신앙고백

입력 2018-12-27 00:05:01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한 기독교인 여성이 겪었던 수난이 최근 국제적인 뉴스가 됐다.

아시아 비비라는 이름의 이 파키스탄 여성은 무슬림이 소유한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2009년 6월 어느 날 농장에서 함께 일하던 무슬림 여성들이 기독교인인 비비가 사용한 물컵은 더러워서 못쓰겠다며 무슬림으로 개종하라고 했다. 비비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무함마드는 우리를 위해 해준 것이 뭐가 있는가’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무슬림 여성들은 분노해서 비비를 폭행했고 비비는 신성모독법 위반 혐의로 형사 고발돼 투옥됐다.

파키스탄 법원은 2010년 1심에 이어 2014년 항소심에서도 비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비비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며 8년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지난 10월 31일 파키스탄 대법원은 하급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하면서 비비를 즉시 석방토록 명했다.

강경파 무슬림들은 앞서 ‘대법원이 비비를 석방하면 판사들을 살해하겠다’고 경고한 상태였다. 2011년 비비를 돕겠다고 나선 펀자브 주지사가 암살되는 등 살해위협은 구체적이었다. 비비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사키브 니사르 대법원장은 내년 1월 퇴임을 앞두고 있기에 골치 아픈 이 사건을 후임자에게 넘길 것이라는 관측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무죄 선고를 강행했다.

대법원은 비비의 자백이 살해 위협 상황에서 나왔다는 점, 검찰이 제시한 증거가 엉성하고 수사도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 수사기관이 비비에 유리한 증거를 배척했다는 점을 무죄의 주된 이유로 지적했다. 판결문 말미에는 ‘비무슬림을 친절히 대하라’는 무함마드의 경구를 넣어 종교적 관용을 강조했다.

추측컨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의 대법원장이나 대법관들 역시 대부분 무슬림일 것이다. 그러나 먼저 시비를 걸어온 무슬림 여인들에게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이 여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종교를 떠나 법관으로서의 양심에 비춰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으리라.

판결 이후 비비의 가족들과 기독교 단체들은 안도와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이슬람 강경파 소수정당인 TLP의 지지자 수천 명은 파키스탄 전역에서 비비의 공개처형과 대법원장의 사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일부 거리는 통제되고 휴교령까지 내려졌다. 후폭풍은 점점 거세어져 기독교인들이 거리에서 강경파 무슬림들에게 이유 없이 구타를 당하고 기독교단체들도 심한 박해를 당하고 있다. 이 사건이 국제적 이슈로 등장하면서 캐나다 이탈리아 등 서구 국가들이 비비와 가족들을 돕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으나 비비가 다시 재판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가 횡행하는 가운데 이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한 고백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거룩한 산제사(롬 12:1)로 드리는 목숨을 건 신앙고백이었을 것이다. 이 여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무죄를 선고한 파키스탄 대법원의 용기 있는 판결은 법원이 왜 사회의 소수자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인권의 보루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고통 받고 있는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을 위해, 살해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정의와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그곳의 의로운 사람들을 위해 우리들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할 때다.

홍창우(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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