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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이병철 회장에게 사랑받아 그 집무실에 걸렸던 그림

입력 2021-11-21 20:50:01
이당 김은호는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 등 각종 공모전에 당선되며 작가 인생 초기부터 인기 작가로 급부상했고 당시에 일본인 부유층을 중심으로 수요가 높았던 ‘미인도’를 특히 잘 그렸다. 이건희 컬렉션인 위 작품은 김은호가 1927년 조선미전에 출품했던 ‘간성’(看星·비단에 채색, 138×87㎝)으로 여인이 마작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담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순종황제 인물상', 1923년(초본). 국립현대미술관


'민영휘 인물상', 1913년(초본). 두 초상화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기존 소장품으로 극사실주의 대가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꿩-쌍치도', 연도 미상.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잉어', 1960년.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산수도 10곡병'(부분), 연도 미상.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이병철(1910∼1987) 회장의 집무실에는 아무 그림이나 도자기가 들어가지 않았다. 도자기는 ‘청자상감운학모란국문매병’과 같은 수준, 그림은 이당 김은호(1892∼1979) 화백의 작품 정도가 되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이경식 저 ‘이건희 스토리’)

‘이건희 컬렉션’은 이건희 삼성 회장 본인과 아내 홍라희씨 수집품, 그리고 아버지 이병철 삼성 창업주로부터 물려받은 컬렉션 등 세 종류로 구성돼 있다. 국가에 기증된 김은호 작품들은 1971년의 집무실 풍경을 묘사한 위 글로 미루어 짐작건대 이병철 컬렉션이다.

김은호는 재벌 회장 이병철의 사랑을 받은 작가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술시장에서는 서양화보다 동양화가 인기 있었다. 김은호는 허백련 노수현 박승무 이상범 변관식과 함께 당시 잘나가던 ‘6대가’ 중 한 명이었다. 게다가 그는 인물화의 최고 대가였다. 처음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 것도 바로 초상화 덕분이었다.

김은호는 인천에서 부농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친척의 위폐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하고 화병으로 죽으면서 집안이 몰락했고, 그는 졸지에 17세에 소년 가장이 됐다. 가족을 이끌고 상경한 그는 이발소 심부름, 인쇄소 직공, 제화공, 측량기사 조수 등 안 해 본 게 없었다. 1912년 어느 날 우연히 그린 그림이 서화가 현채 등의 눈에 띄었고, 이들의 소개로 당대 대가였던 조석진 안중식이 교수로 지내던 경성서화미술회에 2기생으로 입학하는 행운을 얻게 됐다. 그가 친일파 송병준의 사진을 모사한 그림을 본 두 스승이 감탄했다. “신이 내린 ‘내림 그림’”이라는 소문은 궁궐로도 전해지며 순종의 초상화를 주문받았다. 약관 20세에 ‘어용화사’가 된 것이다. 서화미술회에 입학한지 겨우 21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은호는 초상화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타고난 극사실주의 작가였다. 그는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렸는데, 사진보다 더 실물 같은 온기가 있었다. 배채법(천의 뒷면에도 칠을 해 은은하게 색이 배어나오게 함), 육리문(피부 결)을 따라 붓질을 해 얼굴을 표현하는 선염법 등 전통 기법을 살리면서도 서양화의 명암법 등을 적용함으로써 사실감이 있는 자기만의 초상화 세계를 열었다. 고관대작과 종교계 인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쇄도했고 천도교 교주 김연국의 초상화를 그려주고는 집 한 채 값을 받기도 했다.

김은호 하면 미인도를 떠올리게 된다. 그가 여인 인물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들어서다. 1921년 서화협회전에 ‘축접미인(나비를 좇는 미인)’ 등을 출품했고, 조선총독부가 1922년부터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 ‘미인 승무’를 출품해 4등 상을 받는 등 공모전을 통해 여인 인물화 화가 이미지를 구축했다.

미인도는 192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유래돼 국내 거주하는 일본인을 중심으로 수요가 확산했다. 그런 수요자의 미감을 파악해 그는 일상생활 속에 미인을 등장시키는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김은호는 1925년 서화애호가 이용문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절친’ 변관식과 함께였다. 3년간 동경미술학교 청강생으로 지내던 일본 유학은 김은호의 미인도가 일본풍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다. 그는 1926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하는 제국미술전람회에 거문고 타는 여인을 그린 ‘탄금’을 출품해 특선했고, 1927년 잠시 귀국해 조선미전에 마작 하는 여인을 그린 ‘간성(看星)’ 등을 출품했다. ‘탄금’이나 ‘간성’은 그가 유학 전에 그린 미인도와 구도 등에서 차이가 난다. 유학 전에는 여인을 그려도 배경에 나무 등이 큰 비중으로 등장했다. 유학 후에는 일본 미인도의 영향을 받아 인물 자체만 근경에 크게 부각시켜 그리는 식으로 바뀌었다. 부드럽고 화사한 색채, 다소곳이 내리깐 시선 등 일본화적인 것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많다. 심심풀이로 마작 하는 여인을 그린 ‘간성’의 경우 정원의 대나무를 보일 듯 말 듯 은은히 처리함으로써 인물을 강조하는 효과를 낸다. 새장 주변 덩굴 식물의 녹색이 여인이 입은 저고리의 붉은색과 산뜻한 대조를 이루며 인물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성의 치마저고리 무늬에서 장식성이 강하고, 화면에 애상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것도 일본화 경향과 관련이 있다.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고 현재 서울관에서 하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전에서 볼 수 있다.

김은호에게는 친일 경력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그런 그가 3·1운동 때 독립신문 뭉치를 품안에 넣고 거리에서 뿌리며 만세운동을 한 혐의로 6개월을 복역했다는 사실은 가려 있다. 친일 논란은 1937년 ‘애국금채회’ 회원 여성들이 금비녀를 수집해 미나미지로(南次郞) 총독에게 헌납하는 그림을 그린 것이 빌미가 됐다. 또 전쟁을 지원하는 내용의 친일미술 작품을 심사하는 등 친일본적인 행보를 보였다. 공교롭게도 김은호는 그 무렵 조선미전 심사위원이 됐다.

이런 친일이력 때문에 해방 후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회원에 들지 못했다. 또 1949년 출범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심사위원이 되지 못하고 초대작가로 초청받았다. 4회 때부터 심사위원이 됐으나 반목 끝에 국전의 폐쇄성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친일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채색 인물화에 대한 김은호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아 초상화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국회의장 신익희가 주문한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해 전북 장수 논개 사당에서 쓸 ‘논개’, 신사임당, 이율곡, 이순신 등 60년대까지 초상화와 영정을 계속 수주 받았다.

김은호는 초상화 뿐 아니라 여러 장르에 능했다. 동방삭, 삼고초려 등 옛 고사에 나오는 고사 인물화와 신선도도 인기 있어 1920년대 후반부터 만년까지 끊임없이 주문이 밀려왔다. 정교한 묘사와 화려한 구성, 색채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화조화도 인기 장르였다. 산수화의 경우 초기의 수묵 산수화에서 점차 탈피해 채색 산수화를 그렸다.

어쩌면 김은호의 문제는 정치적 논란을 떠나 너무 인기가 있어 결과적으로 작품 세계를 혁신할 기회를 놓친 데 있는 지도 모른다. 미술저널리스트 이규일은 이렇게 말했다. “이당은 운, 화재, 노력이 삼위일체를 이뤄 당대에 화명을 날렸지만 자기 그림을 그리지 못한 게 흠”이라고. 이는 스스로도 동의한 바다.

“나는 내 마음대로 내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남이 원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어. 옛날에는 내게 그림을 청하면 아무개 대감 집에 있는 무슨 그림을 그려달라고 못 박아 부탁해서 그 청에 따를수 밖에 없었지… 지금이라도 내 그림을 그려야지.”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된 ‘산수도 10곡 병풍’(1930), ‘꿩-쌍치도’(연도 미상), ‘노안도’(연도 미상), ‘잉어’(1960) 등은 그렇게 대중의 입맛에 맞춰 그렸던 그림들이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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