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마음을 다스린 어머니는 이제 내게로 시위를 당겼다. 틈만 나면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신앙의 조언을 하시면서 나에게 서울에 있는 요나3일영성원에 가서 기도해 볼 것을 권유했다. 다른 때 같으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하면서 무시했겠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됐다. 나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위기를 깨닫고 순종하겠노라 말씀드렸다.
사실 어머니는 요나3일영성원의 이에스더 목사님을 미리 만나 부모의 속을 썩인 자식이 부디 사업에서 손을 떼고 이제라도 주의 종의 길을 가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하셨단다. 오직 그 길만 열어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이 목사님은 어머니의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아들의 얘기를 들어봐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어머니는 하루라도 빨리 아들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나에게 그곳에 가서 목사님을 꼭 만나보라고 권한 것이었다. 아무런 대책이 없던 나로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이야 못 들어주랴’는 심산으로 어머니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요나3일영성원을 찾은 것은 2005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그때는 1층 예배실 뒤편에 복층으로 만들어진 단식관이 있었다. 몸집이 큰 내게는 좀 작아 보였지만 들어가서 누워보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3일의 단식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진정한 안식이 됐고, 7일 동안 죽을 먹으며 보호식을 할 때는 끼니마다 아하수에로 왕이 배설한 진수성찬과 같았다.
사면이 꽉 막힌 단식관에 가만히 누워서 지난날들을 하나씩 복기했다. 부채가 늘어나면서 잘 다니던 회사도 못 다니고 쫓겨나듯 그만두게 된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더부살이하도록 결정을 내렸던 내가 한없이 미웠다. 그때 나와 아내의 이름으로 진 부채가 자그마치 1억5000만원을 넘었으니 순손실만 3억원에 이른다. 부동산 거래소에서 일하던 몇 달 만에 신기하게도 매매가 잘 이뤄져 1500만 원의 수익금을 손에 쥐고서 기뻐하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 돈으로 서울 송파구에 반지하 방을 구하게 되면서 짧은 기간이나마 시골에 내려갔던 아내와 아들을 서울로 올라오게 해 같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추억으로 슬픈 마음을 달랬다.
막노동이나 배달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자 몸은 자동으로 그 일에 익숙해졌다. 새벽일을 잘하니까 낮에도 일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하지만 가락시장에서 새벽일을 하면서도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거부 의사를 분명히 표하자 사장은 나의 새벽 일마저 그만두라고 했다. 그 바람에 시장에서 쫓겨나게 됐던 일. 그리고 하루가 멀다 않고 괴롭히던 빚 독촉. 대리운전과 인터넷 전화 영업을 하면서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고 해가 질 때면 마음이 울적했던 일. 갈 곳이 없어 서울의 여기저기에 눈에 띄는 찜질방을 하룻밤 안식처로 삼았던 생활.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