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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존재 부정당한 광인도 문명의 일부”

입력 2017-04-28 00:05:01



달래주는 이도 혼내는 이도 없었다. 다들 묵묵히 제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퇴근길 버스에서 가끔 마주치는 한 남자는 쉬지 않고 두리번거리며 뜻 모를 고함을 질러댔다. 그는 압도적으로 눈에 띄었지만 누구도 그를 보지 않았다. 도시에서 ‘정신질환자’는 사실상 없는 사람이었다.

현대인은 합리와 이성의 영역 바깥에 있는 사람을 없는 존재로 취급했다. 이들이 정신질환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은 조현병을 앓고 있는 10대 소녀가 초등학생을 납치 살해하거나, 남성 조현병 환자가 강남역 인근에서 20대 여성에게 칼을 휘둘렀을 때뿐이었다. 정신질환자는 암묵적으로 범죄자이거나 예비범죄자로 규정됐다.

‘광기와 문명’의 저자 앤드루 스컬은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광인’을 직시해 문명의 기만과 문학적 상상력을 파헤쳤다. 저자는 “광기는 문명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문명의 변방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화가, 극작가, 소설가, 작곡가, 성직자, 의사, 과학자에게는 예전부터 중심적인 관심 주제의 하나였다”라고 짚어냈다.

저자는 지역별·시대별 문명이 광인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분석했다. 이를 통해 각 문명이 지향한 정상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광인이 됐다고 여긴 유대인은 유일신의 영적 세계를 문명의 기초로 삼았다. 반면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와 로마의 갈레노스 등은 정신질환의 뿌리가 신이나 귀신이 아닌 신체 내부에 있다는 주장을 앞세워 문명에 과학적 사고능력을 불어넣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광인을 사탄에 쓰인 사람으로 규정하고 성인의 유물이 기적을 행한다고 알려 종교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상당 기간 동안 의사와 성직자는 누가 광인을 담당해야하는지 관할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광인이 신내림받은 예언자도, 사탄에 씐 부랑자도 아닌 격리해야할 정신질환자로 확정된 건 19세기 ‘대감금 시대’때였다. 프랑스는 1838년, 영국은 1845년 법으로 실성한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공공감호소를 설치했다. 이후 20세기까지 의사들은 과학이란 이름으로 정신질환자를 거세했고 뇌에 구멍을 뚫었으며 전기의자에 앉혔다. 현대인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정신병원의 기괴한 모습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반복됐다. 의사는 광인을 다루는 권한을 성직자에게서 완벽히 빼앗았다

그렇게 정신질환자를 모조리 감금해서 문명이 이성과 합리를 회복했을까. 현대를 사는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나라만 봐도 2016년 기준으로 우울증과 불안장애 등 17개 주요 정신질환의 평생 유병률이 남성 28.8%·여성 21.9%에 달한다. 성인 4명 중 1명은 살면서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겪는다는 뜻이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195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에서는 정신병원 입원환자가 급락했다. 의사의 치료가 효과적이지 않다는 게 드러나자 정신과의의 전문성과 장래수익이 위협받았다. 이때 미국 컬럼비아대 정신의학자 로버트 스피처가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을 만들었다. 정상인과 광인을 기계적 설문으로 구분하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생물학이 결합해 병의 원인을 세로토닌 부족과 같은 뇌 생화학의 문제로 설명하자 의사들은 권위를 회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질환자를 치료하지 못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번 세기에는 신과 교황이 아닌 자본과 제약회사가 광인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의사들은 DSM을 개정해 “매번 새로운 질환을 추가”했고 제약회사들은 다양한 향정신성의약품을 “가장 수익성 높은 약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신질환자의 강제 입원을 어렵게 하는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정신보건법) 개정안이 다음 달 30일 시행된다. 최대 1만9000여명의 정신질환자가 4달 안에 퇴원할 수 있다. 이들을 어떻게 보듬어 안을 것인가. 방치하거나 벌하거나 제약회사에 떠넘기는 일 모두 서구 사회에서 벌어졌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광기는 문명 자체의 본질적인 일부”라고 말했다. 우리의 선택이 우리 문명의 본질을 보여줄 것이다.

고승혁 기자 marquez@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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