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남편이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던 날, 수년간 정들었던 교정을 떠나기 아쉬운 듯 남편은 내 손을 잡고 도서관 건물 옆 등산길로 향했다. 오전내 내린 새하얀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 인적 드문 산길이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밟으며 남편은 부르심을 받아 신대원에 오게 된 이야기, 추위를 이겨가며 기도했다는 산 기도의 추억을 들려줬다. 산길 끝자락에는 고풍스러운 기와집 한 채가 세워져 있었는데 높이 솟아있는 종탑과 십자가가 교회라는 것을 알게 했다.
기와집 교회는 1883년 5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마을)에 세워진 소래교회를 복원한 것으로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 없이 세워진 최초의 교회요, 한국교회의 뿌리가 되는 역사적 건물이라 했다. 당시 마을에는 58가구가 거주했는데 이중 50가구의 80여명이 소래교회에 출석했다는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소래교회를 나와 돌아온 길을 뒤돌아보니 새하얀 눈 위에 새겨진 우리 부부의 발자국이 보였다. 그때 문득 이런 다짐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래교회,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처럼 어떤 길이든 그곳이 길이 되기 위해선 누군가의 첫 발걸음이 있었을 테지. 나도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되는 사모가 되리라.’
신대원 졸업 후 남편은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를 거치는 동안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40대 중반이 된 남편은 앞으로의 사역에 대해 고민했다. 부교역자 사임 후 오랜 기도 끝에 남편은 개척으로의 부르심을 확신했다. 개척(開拓)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거친 땅을 일구어 논이나 밭과 같이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듦.’ ‘새로운 영역, 운명, 진로 따위를 처음으로 열어나감.’
개척은 먼 이야기로 느껴왔지만, 남편의 결심 앞에 쿨하게 받아들였다. 취재현장에서 봐왔던 건강하고 작은 교회 모습들 또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들을 보면서 교회를 세우시고 일으키시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마치 부교역자 사모를 졸업하고 개척교회 사모로 입학식을 치르는 듯 설렘과 떨림이 동시에 마음을 휘저었다.
때로는 마음속에 막막함이 몰려오기도 한다. 외벌이가 된 가정, 내 월급 통장을 보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며 현실적인 고민에 직면하곤 한다. 개척이란 낯선 길 앞에 고민이 생길 때면 “웰컴 투 개척 월드”를 외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것 같이 개척의 길에서 교회를 인도하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선배 사모들의 조언을 되새겨본다.
교회개척 준비 소식에 주변에서는 “힘든 시기에 큰 결심 했다”는 축하도 받지만 “지금은 부흥, 개척의 시대가 아니다”라는 우려 섞인 조언도 듣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복음의 따스함으로 보듬고 안아줘야 할 이들이 넘쳐나는 이렇게 힘든 시대야말로 개척의 적기”라고 힘주어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개척의 어려움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고민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는 것 아닐까.
남편의 신대원 졸업식 날 다짐했던 사모로의 결심과 소래교회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려본다. 교회 건축지원금을 거절한 소래교회 성도들에게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 뜻을 존중해 미국에서 가져온 석유 램프 5개를 교회에 기증했는데 불빛이 얼마나 밝았던지 그 빛이 온 동네를 환하게 밝혔다고 한다.
모두가 개척이 힘들다고 말하는 시대, 개척하는 목사 사모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도전하는 신앙과 용기가 필요한 때다. 캄캄한 곳을 비추던 작은 불빛의 소래교회가 한국 땅, 더 나아가 전 세계를 비추는 빛이 됐듯 앞으로 세워지는 개척교회들이 그 지역에 불빛이 되고 따스한 불빛으로 어둠과 추위에 고통받는 이들이 없는 공동체의 역할을 해낼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