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전체메뉴보기 검색

HOME  >  시사  >  출판

[책과 길] 민중 위해 몸 바친 ‘혁명적 인간’의 초상

입력 2017-04-28 00:05:01



고향 전남 강진에 목장을 만들고, 그 풀밭에서 아내에게 피리를 불어주며 사는 게 꿈이었던 청년. 1972년 10월 유신은 당시 전남대 학생이었던 그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꿈꾸며 유신을 단행하자 그는 평범한 삶을 버리고 기나긴 고난의 길로 들어선다.

윤한봉. 그에겐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유신 반대투쟁부터 2007년 61세의 나이에 지병인 폐기종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대동(大同)세계’를 소망했다. 그의 10주기를 맞아 출간된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은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산 윤한봉의 평전이다.

윤한봉은 1970년대 학생운동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인물로 미국 내 한인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를 국제연대로 발전시킨 세계적 활동가다. 1989년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을 주도하고, 임수경의 방북과 판문점을 통한 귀환을 기획하고 추진한 사람도 윤한봉이다.

그럼에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는 12년의 미국 망명 생활로 잊힌 것이 아닐까 싶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윤한봉을 모른다면 나이가 아주 어린 사람이거나 인생을 너무 쉽게 산 사람이다. 일제강점기에 백범이 있었다면 군사독재 시절엔 윤한봉이 있었다”고 단언한다.

그가 민주화투쟁에 본격적으로 헌신한 계기는 라디오를 통해 들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선포 소식이었다. 그는 열불이 올라 벽을 머리로 들이받았다고 한다. 이후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돼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으로 감형돼 복역하다 이듬해 형집행정지로 풀려난다. 함평고구마사건(1978년)으로 활동가로서 추진력을 인정받은 그는 민주청년협의회 전남 책임자로 활동하다 1980년 5월 운명적으로 광주항쟁과 맞닥뜨린다. 신군부에 의해 광주항쟁 주동인물로 수배돼 도피생활을 거듭한 끝에 이듬해 4월 동료들의 도움으로 마산항에서 화물선에 숨어 미국으로 밀항한다.

민족학교를 설립하는 등 망명투쟁을 시작한 윤한봉이 미국에서 자신에게 허용한 유일한 사치는 담배였다. 동지들이 모아준 돈을 허투루 쓸 수 없다며 언제나 꽁초를 주워 피웠고, 그나마 쪼그려 앉아 피웠다. “광주항쟁 때 먼저 보낸 동지들 때문에 서서 피울 자격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윤한봉은 ‘살아남은 죄’ ‘도망친 죄’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의 귀국은 김영삼정부가 들어서고 1993년 수배령이 풀리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그는 미국에서 민족학교 소사(小使)에 만족했던 것처럼 귀국 후에도 돈이나 권위가 주어지는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다. 스스로 붙인 별명대로 ‘합수(合水)’의 삶을 실천했다. 합수는 호남 토박이말로 똥거름이란 뜻이라고 한다. 저자는 “역사와 민중을 위해 인생을 바쳤노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명예도 직위도 돈도 마다하고 스스로 퇴비가 된 사람은 드물다. 윤한봉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말한다.

윤한봉이 그리려했던 대동세상은 화평한 세상이다. 그는 평화의 핵심은 나눠 먹는 것이고, 모든 부당한 것에 저항하며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운동은 증오로 해서는 안 되며 사랑으로 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 책은 진정 가치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든다.

이흥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wlee@kmib.co.kr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