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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실패한 남성이 중심… 시공간 중첩

입력 2017-04-28 00:05:01


김 피디는 똥에 관한 다큐를 제작해 방송계의 스타 피디가 된 시절이 있었다. 이는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이혼을 당한 후 양육비에 쩔쩔매는 처지가 된 그는 고액 연봉을 내민 외주제작사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제작하고 있는 리얼리티 짝짓기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바닥인 상황. 시청률 반전을 위해 그가 내건 회심의 카드는 ‘돌싱 특집’이다. 출연진 중에서 중년 사업가 찰스가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킨다. 마지막 촬영을 하루 앞둔 밤 그가 사라진다. 찰스는 촬영장인 펜션 인근 숲 속에 죽어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현장에 모인 김 피디와 조연출 조국현, 막내 작가 윤지원은 쥐도 새도 모르게 묻기로 합의를 한다. 하지만 난데없이 찰스가 꼼지락거린다.

신예 유재영(36·사진) 작가는 잠든 사람과 죽은 사람조차 구분 못하는 이 덜떨어진 남자들이 벌이는 소동을 다룬 단편 ‘똥’으로 2013년 데뷔했다. 그런 그가 한국을 교집합으로 러시아 필리핀 등으로 소설의 무대를 뻗어갈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못했을 것이다. 그의 첫 소설집인 ‘하바롭스크의 밤’(민음사)엔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를 탁월하게 중첩시킨 8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예사롭지 않은 스케일을 보여주는 그가 한국의 TV 세트장을 무대로 하거나, 광활한 러시아 땅을 무대로 하거나 일관되게 등장시키는 인물들은 남성들, 그것도 ‘실패한 남성들’이다. ‘하바롭스크의 밤’은 한국에서 살인죄로 복역을 마친 뒤 또다시 살인사건에 연루되자 러시아까지 흘러들어간 벌목꾼 ‘율’이 나온다.

단편 ‘똥’에 나오는 이들은 패권적 남성성과는 거리가 먼 왜소하기 그지없는 남자들이다. 김 피디는 섭외가 급하자 전처까지 방송에 출연시키고자 했던 ‘찌질이 이혼남’이며, 조국현은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윤지원은 군대에서 겪은 폭력을 트라우마처럼 안고 사는 ‘띨띨이 막내 작가’다. 심지어 ‘남자 3호’ 찰스도 방송 출연을 통해 뜰 기회를 찾기 위해 이력을 속이고 짝짓기 프로그램에 출연한 무명 배우인 게 드러난다.

사회 중심부에서 탈락한 ‘실패한 남성들’ ‘작은 남성들’의 억눌린 자아가 소설의 전반을 흐르는 기조다. 사회에서 모멸을 견디며 도주하고 싶은 욕망을 안고 사는 김 과장, 박 대리라면 카타르시스보다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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