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을 내리기 30분 전, 그러니까 3월 10일 오전 10시 반경 문재인 후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헌재 심판은 저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때 그에게 전해 주고 싶은 메시지는 헌재 판결이 아니었습니다. …촛불 열망을 정치권이 제대로 수용해 새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지난 70년간의 구조적 적폐를 청산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제 말에 전적으로 찬성했고, 또 그렇게 할 것이라 다짐했지요.”
진보 진영의 원로인 서울대 명예교수 한완상(81)은 문재인과의 통화에서 값싼 통합의 유혹에 빠지지 말기를 바란다고 주문했다고 한다. ‘적폐 청산과 화해 통합은 결코 별개의 과제가 아니다. 청산해야만 바람직한 통합이 가능하다. 청산 없는 통합은 마치 냄새나는 쓰레기와 배설물을 껴안고 사는 것과 같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라는 생각에서다.
이 책은 팔십 평생을 돌아본 한완상의 회고록이다. 한완상은 국내 대표적인 사회학자다. 고향은 경북 금릉, 출생지는 충남 당진, 어린 시절 대구에서 주로 지냈으며 김천중 경북고를 거쳐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에모리대에서 사회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1970년부터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며 비판적 지식인으로 살아왔다. 독재정권 시절 두 번 해직됐고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미국 망명 생활도 했다. 김영삼정부 때 통일부총리, 김대중정부 때 교육부총리, 노무현정부 때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했다.
1부 ‘젊은 벗들에게 부치는 편지’, 2부 ‘새로운 역사에 부치는 편지’로 구성된 이 책은 지식인과 공직자로 살아온 개인사를 회고하며 한국 정치사회사를 기록했다. 삶의 성찰을 통해 앞으로 새 시대를 열어갈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담았다.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라는 책 제목은 공동번역성서의 이사야 11장 6∼9절에서 따왔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비극적 현실에서 갑과 을이 소통하는 참된 평화를 꿈꾸며 살아온 저자의 소망이 오롯이 담겼다.
저자의 어릴 적 꿈은 ‘사회 의사(Social Doctor)’였다. 일제 식민지 잔재, 한국전쟁의 아픔, YMCA 모임 등을 통해 겪었던 역사적·사회적 부조리와 정치적 부패, 사회적 억압 등 한국 사회의 질병을 치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을 통해서는 암기 위주의 한국식 교육의 문제점과 창조적 발상을 위한 탈학습의 교훈을 깨닫는다.
책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에서 활동하며 독재정권에 맞서다 강제 해직된 이야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했을 때의 소중한 깨달음, 미국 망명객 시절 신학 공부를 하게 된 사연, 1987년 민주화 이후 양김의 대권욕과 분열상 등을 반추하며 굴곡진 한국 정치사를 그린다.
통일부총리, 교육부총리 당시 겪은 냉전 수구 세력의 저항과 보수 언론의 색깔론 시비에 대해서는 매섭게 비판한다. 서로를 이용해 기득권을 강화하는 남북한 수구 세력의 적대적 공생 관계의 비극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오늘의 한반도 현실을 염려한다. 그럼에도 이번 촛불혁명을 통해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빛줄기를 보게 됐다며 21세기를 이끌어 갈 새로운 세대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한국 사회의 흐름을 심도 있게 관찰한 노학자의 깊은 성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젊은 세대들이 음미할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간혹 앞뒤가 맞지 않게 시점을 잘못 표기한 부분이 나오고 오탈자 몇몇이 눈에 띄는 것은 옥에 티다.
박정태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