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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흙수저의 역전, 부모하기에 달렸다

입력 2017-05-26 05:05:04



무엇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답한다. 일단 출발선이 중요하다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기는 흙수저 친구보다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그렇다면 흙수저에게 역전의 기회는 없는 걸까. 흙수저 아이를 위해 국가와 부모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은 많은 학자와 정치가를 얽어맨 질문이자 인류의 굴레 같은 주제일 것이다. 하지만 심하게 엉킨 실타래에도 실마리는 있다. 언젠가 이 질문의 실마리는 영국 학자들이 70년 넘게 벌이고 있는 출생 코호트 연구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출생 코호트 연구는 사람들의 생애를 면밀히 살피는 사상 최대의 인간 연구 프로젝트다.

출생 코호트 연구에서 ‘코호트(cohort)’는 로마 시대 보병대를 가리키던 말로 공통점을 가진 집단을 의미한다. 즉, 출생 코호트는 같은 시기 태어난 일군의 사람들이다.

영국 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현재까지 총 7만명 넘는 사람의 인생을 추적하는 코호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1946년 3월 한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 5362명이 첫 표본이었다. 연구 대상은 58년(1만7415명) 70년(1만7287명) 91년(1만4062명) 2000년(1만9519명)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추가됐다. 학자들은 정기적으로 이들의 키 몸무게 성적 변화를 조사한다. 사회인이 된 뒤에는 직업 결혼생활 등을 기록한다. 인생의 변천사를 담는 셈이다.

‘라이프 프로젝트’는 영국의 코호트 연구 역사를 살핀 내용이다. 저자 헬렌 피어슨(44)은 영국 과학 잡지 네이처의 수석 에디터. 그는 4년간 코호트 연구 관계자 150여명을 인터뷰했고 논문이나 신문기사 등 관련 자료를 그러모아 이 책을 썼다.

그동안 코호트 연구가 거둔 성과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의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요술봉 같은 역할을 했다. 예컨대 흡연이 임신부에게 미치는 영향을 밝혀냈다. 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문제에 천착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코호트 연구자들은 임신부가 흡연하면 아기의 체중이 평균 170g 줄고, 출산을 전후해 아기들 사망률도 치솟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영국 여성 3명 중 1명이 흡연자였다. 임신부들이 모두 담배를 끊으면 매년 영국 아기 1500명을 구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똑바로 누워 자는 아기가 엎드려 잠드는 아기보다 돌연사 가능성이 적다거나 생선을 많이 먹는 임신부의 아이는 지능지수가 우수하다는 것도 코호트 연구의 성과물이다. 알게 모르게 인류는 이 연구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오죽하면 저자는 코호트 연구를 이렇게 예찬한다.

‘코호트 과학자에게 중대한 발견 사실을 말해 보라고 하면 그들은 이마를 찌푸리고 몸을 꼼지락대면서 우물거린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코호트는 사회과학 연구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쳐왔다.’

코호트 연구가 정책을 뒤흔든 사례가 많은 건 불문가지다. 가령 경제학자 리언 파인스타인은 90년대 후반 코호트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회계급과 학업성취도 관계를 살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노동계급 아이는 아무리 똑똑해도 나이가 들면 ‘중상류층 우둔한 아이’에게 추월당했다. 이것은 취학 전부터 저소득층 아이를 지원해야 한다는 근거가 됐다.

불평등한 출발이 ‘실패할 운명’을 예고하지만 운명을 바꿀 길이 없는 건 아니다. 해법 중 하나는 부모의 역할이다. 어릴 때부터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아이와 학교에서 배운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집안의 자녀는 가난하더라도 ‘실패할 운명’을 극복하곤 했다.

‘라이프 프로젝트’는 코호트 연구 결과들을 일별하는 재미를 선사하지만 골격을 이루는 내용은 코호트 연구자들의 우직한 삶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바통을 이어 받으며 70년 넘게 이 연구를 이끌었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특출한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는 이유로 연구는 수차례 존폐의 기로에 섰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아 정보의 곳간이 됐다. 어쩌면 이 책은 코호트 연구자들의 삶을 담은 또 하나의 코호트 연구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인간의 삶을 지켜보고 기록하며 사람마다 다른 인생을 걷는 이유를 이해하려는 욕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계속 싸우고 있다. 이미 존재하는 연구들을 유지하면서, 기회가 생기면 미래의 아이들도 추적할 것이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7만명이 여태 풀지 못한 과학과 사회의 미스터리들을 풀어줄지도 모른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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