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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우 기자의 재팬 스토리] 일본인인 게 자랑스럽다, 말하려면…

입력 2017-06-14 05:05:03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 전 주한 일본대사가 쓴 책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좋았다’(사진)가 이달 초 일본에서 출간됐습니다. 앞서 알려진 대로 문재인 대통령을 종북·반일 성향이 강한 ‘최악의 대통령’으로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 고위 외교관이던 사람이 이렇게 자극적인 혐한(嫌韓)의 글로 자국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는 현실이 씁쓸합니다.

이 책의 제목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좋았다’는 두 달 전 일본에서 화제가 됐던 포스터 문구인 ‘나, 일본인이라서 좋았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일본 전역의 신사(神社)를 포괄하는 ‘신사본청’이라는 단체가 6년 전에 일장기 게양 캠페인용으로 만든 포스터입니다. 문구에 차별적인 요소가 있는 데다 포스터에 나온 모델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일본 SNS에서 논란거리가 됐습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일본인이라서 좋았다’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책 제목과 포스터 문구에서 일본 사회의 퇴행이 느껴집니다. 반전(反戰)운동을 펼친 양심적 지식인 가토 슈이치(加藤周一)에 따르면 1930년대 말부터 1945년까지 일본에선 사람을 모독할 때 “그래도 당신이 일본인인가”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일본인 집단에 대한 귀속이 강조됐던 것이지요.

가토는 2002년 신문 기고문에서 “‘먼저 일본인’주의자와 ‘먼저 인간’주의자의 다수-소수 관계는 1945년 8월을 경계로 역전됐다. 그러나 정말 역전된 것일까. 만일 그때 일본인이 변했다면 ‘그래도 너는 일본인인가’라는 말을 다시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먼저 인간’주의자는 일본인 정체성과 귀속의식을 앞세우기보다 보편적 인간성을 우선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일본 패망 이후 그런 사람이 다수가 됐었는데 이제는 다시 소수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회의감을 나타낸 글입니다.

가토는 2008년 세상을 떠났고 이후 세상은 더 바뀌었습니다. 일본인임을 자랑스러워하고 노골적으로 예찬하는 문구가 횡행하는 것을 보니 지금은 ‘먼저 일본인’주의자가 확실히 다수가 된 것 같습니다.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 팽배했던, 구시대의 의식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도쿄=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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