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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건강] ‘깜빡’ 늘었다면 치매 검진등도 ‘깜빡깜빡’

입력 2017-06-20 05:05:04





 
가천대 길병원 뇌건강센터 임상심리사가 지난 16일 60대 여성의 신경심리 및 인지기능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김지훈 기자




수년 전 직장에서 은퇴한 이모(68)씨는 요즘 물건을 놓고 다니는 실수가 잦다.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기는 일도 많아졌다. 평소 물건을 두는 장소에 뒀다고 생각했는데, 찾고 보면 다른 곳에 놓여 있었다. 또 분명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당일에 기억하지 못했다. 상대방 연락을 받고서야 부랴부랴 약속을 챙기는 일도 되풀이됐다. 가족과 지인들은 “건망증이 심하다”고 얘기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러려니”하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 이씨는 손녀 이름이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기억났다. 급기야 가족 손에 이끌려 인근 보건소를 찾았고 간이정신상태 검사(MMSE-DS)를 받았다. 병원은 정밀 치매 검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인지기능, 신경심리, 뇌 MRI 검사 등을 통해 경도인지장애(MCI)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치매까지 진행된 건 아니었다. 주부 이모(39)씨도 요즘 들어 깜빡깜빡하는 일이 늘고 있다. 남편에게 급히 전화를 걸려 하는데, 번호가 선뜻 기억나지 않았다. 저장된 연락처를 확인하고서야 번호가 생각났다. 또 장보러 가서는 뭘 사기로 했는지 까먹었다. 결국 마트를 몇 바퀴 돌고 나서야 사기로 한 물건이 떠올랐다. 물건값 계산을 틀리는 일도 빈번했다. 이씨는 “언젠가는 현관문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남편에게 전해해 번호를 확인한 일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검사 결과 이씨 역시 경도인지장애였다.

건망증과 다른 치매 전 단계

경도인지장애는 말 그대로 가벼운 정도로 기억을 못하는 질환으로, 흔히 ‘예비 치매’로 표현된다. 정상적인 노화와 치매의 중간 단계에 해당된다. 비슷한 학력 수준이나 연령대보다 인지기능, 특히 기억력이 떨어져 있으나 일상생활 수행능력은 보존돼 있어 치매라고 할 정도로 심하지 않은 상태다.

가천대 길병원 뇌건강센터 연병길 교수는 19일 “사고력 대부분이 정상이지만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다”면서 “치매에 비하면 추리력, 언어·계산력, 주의집중력, 시공간 지각 능력 등이 대부분 정상이지만 단순 건망증에 비해 여전히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지하철·버스 타기나 전화 걸기, 식사 준비 및 설거지, 세탁기 돌리기 같은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치매의 경우 기억력뿐 아니라 다른 인지기능이 점차 떨어지고 급기야 이런 일상생활 수행도 불가능해진다.

길병원 신경과 이현 교수는 “경도인지장애의 주요 증상은 방금 있었던 일이나 최근의 일을 잊어버리는 단기 기억력 저하가 대표적”이라며 “날짜나 시간 개념이 떨어지거나 대화하다가 적절한 단어가 생각 안 나고 이전에는 스스럼없이 하던 일을 잘 못하고 계산 실수가 잦아지는 등 다양한 증상이 있다”고 말했다. 경도인지장애 유형 중에는 기억력은 크게 저하되지 않으면서 언어, 시공간 능력 등에 손상이 있는 경우도 있다.

65세 이상 경도인지장애가 있는 노인 가운데 매년 10∼15%가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진행된다. 정상 노인의 매년 치매 진행 비율(1∼2%)보다 10배 이상 높다. 대한치매학회는 “약 50%의 경도인지장애 환자가 3년 안에 알츠하이머로 발전한다”고 밝혔다.

한양대병원 신경과 김희진(대한치매학회 이사) 교수는 “경도인지장애는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한 치매를 비교적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단계로, 치료 효과 또한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특히 기억상실형 경도인지장애는 알츠하이머 치매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은 반면 비기억상실형인 경우 혈관성·파킨슨병 치매나 레비소체 치매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7년 새 6.4배 급증

경도인지장애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매년 크게 늘고 있다. 19일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경도인지장애로 진료받은 환자는 15만7809명으로 2010년(2만4602명)에 비해 7년 새 6.4배 급증했다. 2015년(12만6670명)과 비교해도 24.6% 늘었다.

지난해는 여성(10만7962명)이 남성(4만9847명)보다 2.2배 많았다. 여성 인구가 남성보다 평균 수명이 길기 때문으로 보이며 여성호르몬 감퇴와 관련 있다는 보고도 있다. 치매 인구도 여성이 더 많다.

연령별로는 70대가 40.3%(6만3672명)로 가장 많았고 60대(25.8%), 80대 이상(21.2%), 50대(10.1%), 40대(1.9%) 순이었다. 87.3%가 60대 이상 고령이었다. 50대 이하 환자 발생(12%)은 ‘40∼50대 초로기 치매’가 늘고 있는 것과 관련 있다. 김 교수는 “나이가 많고 학력이 낮거나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심장병 같은 혈관 위험인자가 있는 경우, 뇌졸중 경험자, 특정 유전자(아포지단백질 E4 유전자), 비타민D 결핍, 수면호흡장애가 있으면 치매로 진행될 위험이 높다”고 설명했다.

효과적인 약물 치료법은 없다. 인지훈련이나 인지재활이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추거나 치매 발생을 억제해 준다는 연구보고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인지 건강을 위협하는 여러 위험인자(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흡연 비만 등)를 개선하고 뇌 건강을 위한 좋은 생활습관이 몸에 배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건복지부와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65세 이상 치매 환자는 2015년 기준으로 64만8223명이다. 65세 이상 전체 노인의 9.8%가 치매 환자였다. 치매 환자는 올해 72만명으로 늘고 2024년 100만명을 넘어선 뒤 2041년 2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예비 치매’인 경도인지장애 환자의 유병 숫자는 훨씬 더 많다. 2015년 기준 184만6857명(유병률 27.9%)으로 집계됐으며 올해 이미 200만명으로 추정됐다.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 2033년 400만명, 2041년 5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경도인지장애는 치료, 치매는 돌봄

경도인지장애 등 치매 고위험군을 조기에 발견하려면 지역 보건소나 치매지원센터 또는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치매 관련 검사를 받는 것을 권장한다.

전국 시·군·구 치매지원센터에선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무료 치매 선별검사를 해주고 있다. 간단한 문답으로 진행되는 선별검사 도구를 사용하고 비슷한 나이 성별 학력을 지닌 집단의 평균 인지 기능과 비교해 대상자의 인지 기능 저하 여부를 판단한다.

이곳에서 치매나 경도인지장애 여부를 판단하진 않고 일정 점수 이하일 경우 인근 병원 등에 의뢰해 진단검사(신경심리검사, 전문의 진찰)와 감별검사(혈액검사, 뇌영상촬영 등)를 통해 경도인지장애인지, 어떤 종류의 치매인지 판단하게 된다.

치매의 경우 일정한 소득기준(중위소득 120% 이하)에 해당되면 진단검사가 무료 지원되고 향후 치료 시 월 3만원 이내 실비 지원도 이뤄지고 있다. 다만 병원에서 자비를 들여 검진할 경우엔 신경심리검사(10만∼30만원)와 최종 진단에 필요한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 아밀로이드PET 등 검사(100만원 이상)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치매국가책임제를 내세운 새 정부는 무료 검사 지원 대상을 늘리고 신경심리검사 및 일부 뇌촬영검사 등에 건강보험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전국 47곳뿐인 치매지원센터도 252개로 늘릴 계획이다.

경도인지장애는 지원이 없다. 병원에서 운영하는 인지재활 프로그램(작업·미술·음악·원예 치료)도 건강보험이 안 된다. 일부 치매지원센터는 인지재활 서비스를 무료 운영하고 있지만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인천 계양구 치매통합지원센터 심희영 팀장은 “치매로의 진행을 막으려면 경도인지장애 단계에서 체계적인 인지프로그램 제공이 중요하다”면서 “치매센터 내부에서 진행된다는 이유로 부정적 시선으로 보고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인식 개선 및 지원을 촉구했다.

한양대병원 김희진 교수도 “이미 치매로 진행되면 느리지만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치매지원센터 등에선 전 단계서 발견 시 ‘치료(Cure)’, 치매 단계에선 ‘돌봄(Care)’으로 구분해 단계별 지원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기 검진을 위해 40∼50세 땐 3년 또는 5년 주기로 신경인지기능 검사 확대, 50세 이상에서는 2년마다 한 번씩 인지기능 검사를 실시해 환자의 진행 단계를 확인하고 이상이 발견된 시점부터 통합적 관리와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글=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사진=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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