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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청계천 물길도 도시침술의 좋은 사례

입력 2017-06-30 05:05:03
프랑스 파리 튀일리 공원 풍경. 공원은 모두의 것이지만 연못가에 놓인 의자가 공원을 ‘나만의 장소’로 만들어주고 있다. 이 의자를 ‘도시침술’로 볼 수 있다. 푸른숲 제공






휘황찬란한 마천루가 즐비하지만 막상 나를 반기는 불빛을 찾긴 어렵고, 거리에서 실수로 신발 뒤축을 밟으면 성난 얼굴이 나를 노려본다. 도시인들은 도심에서 몸을 웅크린다. 우리가 아는 도시는 우리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이 남자는 대담하게 말한다. 도시는 우리가 가꿔야할 커다란 집이라고.

그는 ‘도시침술’(푸른숲)의 저자 자이미 레르네르(80·사진)다. 레르네르는 도시개발 분야에서 도시침술(Urban Acupuncture) 개념을 고안한 세계적 도시계획가이자 건축가다. 도시침술이란 아픈 몸을 얇은 침으로 치료하듯 쇠락한 도시공간에 최소한으로 개입해 도시를 활력 있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3차례 브라질 쿠리치바 시장을 역임하면서 쿠리치바를 ‘꿈의 생태도시’로 만들었다. 1990년 유엔 환경최고상을 받았고 2002∼2005년 국제건축가협회장으로 활동했다. 레르네르는 서울 청계천을 비롯해 전 세계 수십여 개 도시에 도시침술 자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엔 미국 타임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25인에 꼽혔다.

‘도시침술’은 그의 첫 책이다. 레르네르는 서문에서 “치료결과가 좋으려면 의술뿐 아니라 의사와 환자 사이의 상호작용이 필요하듯 도시계획이 성공하려면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내야 한다”며 “이는 사람들이 도시생활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책은 도시에 대한 저자의 글 39편을 모은 것이다. 먼저 간단한 도시침술 요소를 소개한다. 개발이라면 뭔가 부수고 새로 만드는 걸 생각하기 십상. 하지만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길 위에서 남녀 한 쌍이 탱고를 추는 모습을 첫 장면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고유한 노래나 운율이 도시의 정체성을 만드는 침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야경을 만든 조명, 프랑스 안시 운하와 서울 청계천의 물길도 좋은 침술이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도시를 낭만적으로 만드는 것들을 침술의 예로 보여준다.

진정한 도시재생은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고 만남의 장소를 제공한다. 그는 일본 도쿄의 충견(忠犬) 하치코 동상을 훌륭한 정서적 도시침술의 예로 든다. 하치코는 주인이 숨진 뒤에도 9년여 동안 매일 역에 마중 갔던 개다. 도쿄 시민들은 이 개의 기억을 떠올리며 동상 앞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모든 이야기는 공동체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이탈리아 돌체아쿠아에서 친구를 찾은 장면에서 그는 “좋은 도시에서는 아직도 세 번만 외치면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도시가 ‘연대의 마지막 피난처’라고도 말한다. 압권은 우리 모두 황량한 이 도시의 침술사가 될 수 있다는 조언. 버스 기사와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고 친구와 동네 단골 카페에서 만나는 것도 침술이란다. 누구나 침술사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는 대목이다. 책을 덮을 때쯤 이 도시가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우리 모두의 집이라는 자각이 일어난다.

책은 흡사 여행기 같은 인상을 준다. 저자가 전 세계 주요 도시의 컬러사진 50여장을 보여주며 도시설계자처럼 공간의 의미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감수를 맡은 조경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도시인들이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고 그 매력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에 대한 글”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전문적인 도시계획 강의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얇은 두께에 방만한 사례가 다소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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