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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장지영] 블랙리스트, 진실과 화해

입력 2017-06-29 17:55:01


박근혜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지원배제 명단)와 관련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관련자들의 재판 심리가 마무리됨에 따라 7월 3일에는 1심 선고가 이뤄질 예정이다. 하지만 재판을 바라보는 문화예술계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김 전 실장의 계속된 혐의 부인 외에도 블랙리스트 실행에 관여했던 문체부 고위 공무원들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간부들이 어느새 피해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실 블랙리스트의 피해자는 예술가들인데도 이번 재판에선 철저하게 배제돼 있다. 게다가 최근 감사원이 발표한 문체부 산하기관에 대한 블랙리스트 관련 감사 결과는 실무자들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는 게 문화예술계의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 연극인들을 중심으로 지난해 11월 발족한 검열백서위원회는 그동안 블랙리스트 관련 자료를 모으고 쟁점을 토론해 왔다. 다시는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으려면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필수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 26일 검열백서위원회는 ‘블랙리스트 사태를 바라보는 정밀한 관점’이라는 제목의 포럼을 열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공개했다. 언론 보도, 특검 수사, 재판, 감사원 감사 등을 꼼꼼히 살펴보고 맞춰본 결과 문체부 공무원과 예술위 간부들의 역할이 검열 과정에서 매우 컸다는 게 포럼 토론의 핵심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문체부 김모 국장이다. 언론과 특검에 청와대 지시에 따른 문체부 간부들의 좌천성 인사와 블랙리스트 실행을 폭로했던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김 국장이 예술정책을 수립하고 예술위 등 산하기관을 감독하는 예술정책관 시절 블랙리스트에 저항하다 좌천됐다고 지난 1월 밝혔다. 산하기관에 내려가 있던 김 국장은 ‘블랙리스트 투사’로 떠올랐으며 한 달 뒤 인사에서 본부로 복귀했다.

하지만 검열백서위원회는 포럼에서 실명까지 밝혀가며 김 국장이 청와대의 지원배제 지시를 부하 직원에게 이행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가 예술정책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예술위 등 산하기관에서 187건의 예술가 및 예술단체에 대한 지원배제가 이뤄졌다. 블랙리스트 피해 예술가의 상징적 존재인 극작가 겸 연출가 박근형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창작산실에서 배제된 것도 이때다.

김 국장 외에 적지 않은 문체부 공무원과 예술위 간부들이 블랙리스트 관련 잘못을 저지르고도 감추거나 축소하는 모습이다. 심지어 일부는 노골적으로 거짓말까지 하고 있다. 여기에 예술위의 지원심사에 책임심의위원으로 참여했던 일부 예술가, 기획자, 평론가도 검열에 적극 동참했음이 드러난 상태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취임 이후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문화예술계에선 문체부가 주도하는 진상조사위원회로는 결코 진실을 밝힐 수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통령 직속 범정부 기구로 만들어야만 국정원 등까지 광범위하게 얽혀 있는 블랙리스트 문제를 파헤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블랙리스트 진상조사가 징벌만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자칫 문화예술계가 갈가리 찢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넬슨 만델라 대통령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1994∼1998)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당시 진실화해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시절 인권 침해의 총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국민 앞에 범죄를 고백한 가해자는 사면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물론 가해자가 사면을 신청한다고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5년간 7112건이 신청돼 5392건은 아예 접수가 거부됐고, 849명이 사면받았다. 한국의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도 정확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비슷한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장지영 문화부 차장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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