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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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신창호] ‘핍박받은 자 복이 있나니’

입력 2017-06-30 17:30:01


2007년 7월 19일 한국인 기독교도 23명이 아프가니스탄 가즈니주 카라바크 지역에서 탈레반 세력에게 인질로 붙잡혔다. 이른바 분당샘물교회 선교단 인질 사건이다. 한국은 난리가 났다. 정부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국가정보원까지 동원했다. 탈레반은 인질들을 미끼삼아 기독교 선교사들의 완전 철수와 탈레반 죄수 전원 석방을 요구했다. 그리고 “제발 여성 성도들만이라도 풀어주라”고 간청하는 배형규 목사와 심상민 선교사를 살해했다. 논쟁에 불이 붙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 신자를 보내는 게 무슨 선교냐” “무슨 권리로 무슬림을 개종하겠다는 것이냐”는 비난이 들끓었다. 교회 하나 때문에 국가정보기관까지 동원됐고 국민의 세금이 낭비돼야 하느냐는 말도 나왔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조선왕조가 급격히 몰락하던 시기, 한반도에는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건너왔다.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다수는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따라 절두산 성지에서 능지처참(凌遲處斬)됐다. 고루한 유교사상에다 신분의 차별, 남녀의 차별이 넘쳐나던 조선에서 “사람은 차별이 없다”거나 “누구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결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상식이었다. 그래도 선교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순교에 순교가 이어지는 ‘극도로 위험한 땅’에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기도 했고, 근대화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아랍어로 ‘이슬람(Islam)’은 복종하다 또는 지배받는다는 뜻의 동사다. 당연히 절대자에 대한 복종, 신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또한 이 단어는 평화를 뜻하는 살람(Salam)의 기원이기도 하다. 신에게 복종하면 평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그런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전 세계에 18억명이나 된다.

하지만 2001년 9·11테러 이후 이슬람이란 말은 테러를 상징하는 단어로 여겨지게 됐다. 자신들의 절대자, 자신들의 신 ‘알라(Allah)’를 위해 폭력과 살인, 테러마저 서슴지 않는 극단주의 무슬림이 창궐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전체가 극단주의는 아니지만 이슬람 국가 대부분이 ‘야만의 상태’로 남아 있다. 남성들이 여성을 동격의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개인의 인권은 묵살되는 사회. 버젓이 일부다처제가 성행하고 이방인과 타종교를 핍박하는 사회. 이런 모든 차별과 부당함을 알라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사회. 용서보다는 복수, 관용보다 배타, 사랑보다 증오가 지배하는 사회.

그런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언제나 선한 일이다. 어부와 목수, 유곽의 여인, 편견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조차 증오하지 않고 되레 감싸 안아 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무슬림에게 나눠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억압당하고 핍박받는 무슬림, 편견에만 사로잡혀 다른 이를 억압하는 무슬림들도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존중받아야 할 천부인권이 있고, 치료받아야 할 상처가 있으며, 서로 함께 웃고 울며 공감할 줄 아는 ‘신의 아들 딸’들이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은 기독교도의 사명이다.

오는 22일 분당샘물교회에선 작은 포럼이 열린다. 배 목사와 심 선교사의 순교정신을 기념하는 행사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글을 배웠다는 이유로 여자아이가 얼굴 반쪽을 잘려나가야 했던 야만의 땅 아프가니스탄으로 기꺼이 달려갔던 이들이다. 알라의 이름으로 복수와 저주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에게조차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하려 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우리 교계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10년 전 논란을 의식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두 목회자의 희생을 외면해선 안 될 일이다. 그들이 뿌린 겨자씨가 열매가 되도록 돕진 못하더라도 ‘의를 위하여 핍박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건네야 하지 않겠나.

신창호 종교기획부장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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