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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황주리의 나의 기쁜 도시] 고요한 마을, 운남성 사계

입력 2017-06-30 17:35:01
황주리 그림


처음 중국 여행을 가면 대륙의 규모에 우선 놀라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운남성은 갈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른 독특한 기억의 디테일을 남긴다. 작은 기와집이 수없이 모여 거대한 풍경을 이루는 모습을 바라보면 문득 타임머신을 타고 오랜 옛날 어딘가 낯선 시간 속에 떨어진 아득한 기분이 된다. 내 어린 날 기와집에 대한 기억이 늘 애틋해서일까. 광화문 내수동의 좁고 긴 골목길 막다른 대문 집이던 우리 집의 기억은 통인동에 있던 초등학교 근처인 옥인동 누상동 누하동 등에 살던 친구들 집의 기억과 연결된다. 작고 허름하든 크고 대궐 같든, 우리 집이든 친구네 집이든, 그리운 기와집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운남성 여강 고성에서 만난 오래된 기와집들의 풍경은 어린 날 기와집의 기억을 집대성해 놓은 것 같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옛집을 개조한 카페 4층 꼭대기에 올라가 여강 고성을 내려다보면 오밀조밀한 기와들이 모여 거대한 기와 무덤을 이룬다. 중·고등학교 시절 고궁에서 수채화를 그리던 이래 정말 오랜만에 나는 풍경화를 그리고 싶었다. 도시계획 탓에 사라져버린 어린 날 옛집에 대한 아쉬움은 오래전에 잃어버린 보물섬 지도처럼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다. 여강 고성의 밤 풍경은 한 번도 꾸어보지 못한 화려한 꿈속 풍경 같다. 빼곡히 들어선 낡은 집들의 옛 향취는 물건을 사고파느라 정신없는 상업주의에 묻혀 어쩔 수 없이 제 맛을 떨어뜨린다.

고요한 그대로의 옛집들을 꿈꾸는 여행객의 마음은 과욕일지도 모른다.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 화려하게 빛나는 옛집의 배경음악은 요즘의 테크노 음악이다. 온 몸을 흔들어대는 젊은이들이 좁은 골목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여강의 밤 풍경을 떠나 한적한 마을 ‘사계(沙溪)’에 들르게 된 건 행운이었다.

대리와 여강 사이 고요한 마을 사계는 그 옛날 수십 마리 말과 함께 중국의 보이차와 약재 등과 티베트의 소금과 말과 야크를 교역하던 차마고도 상인들이 멀고 먼 여정 동안 이곳에 들려 쉬면서 숨을 골랐던 곳이기도 하다. 그 시절엔 시장이 크게 들어서기도 했다는, 차마고도에서 가장 원형대로 보존돼 있는 사계 마을은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아직은 세상과 단절된 묘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찻집과 기념품 가게들과 그대로 보존된 낡은 전통 가옥들이 늘어선 골목길을 걷다가 길을 잃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마을이 너무 작아 길을 수십 번 잃는다 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슬며시 해가 지기 시작하면 사등가를 따라 마을로 내려가 반달문을 지나 명나라 때 만들어졌다는 다리 ‘옥진교’에 오른다. 내려다보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흑혜강이 흐르고 건너편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수수밭과 해바라기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일몰을 맞는다.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던 함형수의 시 ‘해바라기의 비명’이 떠오르는 풍경이다.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 같이 태양 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그러고 보니 중국 운남성의 모계사회로 이뤄진 나시족 모소인들에게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진짜 사랑이 없을까. 사랑이라는 말만 무성한 현대인들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모두가 다 사랑이라서 특별히 있을 필요가 없는 건 아닐까.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하나둘씩 홍등이 켜지기 시작하고 낮과는 전혀 다른 사계 마을의 밤 분위기가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영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작고 어둑한 음식점에 들어가 매콤한 요리들을 먹고 나오니 메인 광장의 은근한 어둠 속에 마을 사람들이 산책을 나와 신기한 운동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마치 꿈속에서 낯선 길을 걷는 기분으로 불이 켜진 작은 찻집들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고풍스럽게 보이는 찻집 한 곳에 들어가 보이차를 마셨다. 그 옛날 티베트의 소금과 야크와 바꾸던, 보이차라면 단연 운남성이 아닐 수 없다.

주인아주머니가 보이차를 내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 했더니, 멀리서도 왔다며 자기는 이곳에서 태어나 운남성 외에는 가본 곳이 없다 했다. 중국어로 통역해주는 친구 덕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차마고도 마방(상인)이었다는 그녀의 얼굴에 사계 마을의 쓸쓸함이 감돌았다. 휘영청 달이 밝은 밤, 나는 문득 고요하고 신비로운 꿈속 같은 이곳에서 태어나 아무 곳도 가본 적 없는 사람과 안 가본 데라고는 없는 사람의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은 어떻게 다를지 생각해보았다. 이미 그곳이 꿈속이라 잠을 자도 꿈은 꾸지 않을 것 같았다.

황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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