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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더위 잊고 감성 살찌우고… '북캉스' 떠나요

입력 2017-07-07 05:05:04










한낮 더위를 잊는 덴 재밌는 이야기가 최고다.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윤성근, '공포의 외인구단'의 만화가 이현세, 격월간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김용언, '생의 이면'을 쓴 소설가 이승우에게 올여름 휴가지에서 읽을 만한 책 4권을 추천받았다. 어느 책이나 첫 문장은 작가가 가장 공들여 쓰는 대목. 그래서 추천받은 책의 첫 문장(고딕 부분)으로 책 소개를 시작한다.

정리=강주화 기자

■젊은 도시, 오래 된 성
김연수 외 지음, 자음과모음


"지금 한낮의 사이쿄 선 지하철에서 졸고 있다. …자칫 자살하지 않도록 조심해." 한·중·일 대표작가 12명이 도시를 주제로 쓴 단편소설집에 있는 '사도(死都) 도쿄'의 첫 문장이다. 무슨 말일까. 다음 문장을 읽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책을 고를 때 주로 첫 문장을 주의 깊게 살핀다. 특히 단편소설은 강렬한 첫 문장이 중요하다.

경제대국 일본, 세계적인 대도시 도쿄는 소설 속에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마구 뒤섞여 살아가는 수상한 공간이다. 일본 작가 시마다 마사히코는 이 소설에서 죽은 사람들이 저마다 도쿄에서 환생하는데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시절로 지정해 돌아갈 수 있다는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 외에도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 정이현의 '오후 네시의 농담' 등이 실렸다. 중국 위샤오웨의 '날씨 참 좋다'와 일본 오카다 도시키의 '참을 수 있는 단조로움' 등 여러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재기발랄한 단편이 선물 보따리처럼 독자를 유혹한다. 도시로 여행을 떠나 소설 속에서 또 다른 도시를 만나는 색다른 경험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초년의 맛
앵무 지음, 창비


"어렸을 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적이 있었지만 어른들이 많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는 것 말고는 그냥 '장례식 때는 육개장을 먹는 거구나' 하고 알게 된 것뿐." 만화 첫 페이지에 나오는 주인공의 독백이다. 주인공 '나'에게 장례식은 육개장 정도로만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친했던 친구 호재가 배달을 가다 트럭에 치여 즉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장례식장에 가보니 한 친구는 사흘 내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사실 청년들에게 죽음이란 낯선 것이다. 지금 내 나이에도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매우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육개장이라는 소재로 친구를 떠나보내는 마음을 정직하게 그린다. 이 책은 음식을 주제로 한 24개 옴니버스 만화 모음이다.

앵무는 나의 제자다. 그가 대학에서 이 그림을 그리는 걸 옆에서 지켜봤다. 인생 초년에 겪는 좌절과 아픔을 음식을 소재로 어쩜 그렇게 재미있게 그려내는지 감탄했다. 재미있는 만화는 항상 정직하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수치 이기심을 대면할 수 있다. 청년들은 공감하고, 장년들은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가짜 경감 듀
피터 러브시 지음, 엘릭시르


"1921년 9월 9일 모리타니아 호. 선상에서 의문사가 발생하여 스코틀랜드 야드의 듀 경감에게 수사를 의뢰하였음. 스코틀랜드 야드 수사과 앞. 선장 A H 로스트론 발신." 첫 문단이다. 선상, 의문사, 듀 경감, 수사 의뢰…. 이런 단어들이 일으키는 상상은 배 위에서 일어난 희한한 살인사건이다. 이야기는 상상을 배반하지 않고 전개된다.

사람들은 일단 추리소설을 생각하면 아주 심각하거나 끔찍한 걸 떠올린다. 그런데 이 소설은 유머와 추리가 결합돼 있다. 한 마디로 아주 재미있단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희화화한다거나 살인범을 미화하는 게 아니다. 살인 행위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타인을 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관조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본격 미스터리물의 격조를 뽐낸다. 수수께끼를 정교하게 풀어가는 과정이 흥미로워서 한번 책을 펼치면 다 읽을 때까지 놓기 쉽지 않다. 휴가 때는 몰입해서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추리물이 최고다. 게다가 이 소설의 배경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소설을 읽으면 모리타니아 호 어딘가에 내가 있다는 착각이 든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지음, 예담


“인천 주안역 뒷골목의 편의점 앞, 무지개색 파라솔 밑엔 건달들 몇 명이 둘러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첫 문장에 이런 풍경이 나온다. 건달들의 얘기다. 인천 뒷골목의 노회한 조폭 두목 양 사장을 중심으로 한방을 찾아 헤매는 남자들의 지질하면서도 우스꽝스런 이야기가 무협지처럼 펼쳐진다.

인물 대사나 주변 묘사가 리얼해서 내 눈앞에서 건달들이 마구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캐릭터가 장난스럽다거나 이야기가 억지스러운 게 아니다. 건달들 얘기를 경쾌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그린다. ‘정규직’ 건달이 되고 싶어 하는 조무래기 건달,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거물들의 피 튀기는 경쟁, 35억짜리 종마를 훔쳐 도망가는 ‘울트라’….

소설 속에서는 목표물을 가장 먼저 가진 사람만이 승자가 되고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 성공을 증명하려 애쓴다. 사회적 은유이다. 남자들은 배꼽 잡으며 서글픈 동질감을, 여자들은 폭소하며 수컷들의 세계를 경멸하려나. 여하튼 휴가 땐 재미있는 책을 읽어야하지 않겠는가. 근래 읽을 소설 중에 가장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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