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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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전정희] ‘소금길’의 가엾은 사람들

입력 2017-07-14 17:20:02


지난봄 서울 염리동 소금길 출사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 지하철 이대역 5번 출구를 빠져 나와 왼쪽 염리동 골목길을 부르는 명칭이 소금길입니다. 염리동은 한양 도성에 수산물을 대던 마포나루 어시장 때문에 생긴 이름입니다. 생선이 썩지 않으려면 당연히 많은 소금이 필요했겠지요. 그 소금 저장창고가 많았던 지역이 지금의 염리동과 대흥동, 도화동 일대입니다. 소금머리골이라는 소금배 전용 포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이 염리동을 포함한 마포나루 일대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공덕리계(契)였습니다. 여기에 1900년 동막교회가 설립됐습니다. 동막은 생선을 소금으로 절이기 위한 옹기 즉, 독막의 변음에서 유래했습니다. 동막교회는 무어 선교사가 세운 도성 밖 거점교회였습니다. 도성 안 백정에게 복음을 전했던 무어는 도성 밖 가난한 날품팔이와 옹기장이 등에게도 기쁜소식을 전했죠. 이후 서울 대현교회, 용산교회 등이 분립됩니다.

염리동엔 도시 서민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6·25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도시 빈민이 된 이들이 산자락에 판잣집을 짓고 정착했습니다.

가파른 소금길을 오르면 등마루에 이르고 그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아현동이 나옵니다. 이 아현동은 최근 재개발되어 아파트 숲을 이루었습니다. 강남권 못지않게 비싼 아파트가 됐습니다. 집주인들만 부자 됐습니다.

지금 염리동 골목길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아파트 재건축을 위한 터 닦기가 한창이죠. 포클레인과 레미콘 차량, 대형 트럭 등이 분주히 오고 갑니다. 이대역 아현역 공덕역 대흥역을 지점으로 선을 그으면 박스가 되고 그 박스 안 서민 동네가 아현재정비촉진구역으로 지정됐습니다. 고급 아파트가 들어섰지요. 염리동 지역이 그 막바지 공사 현장이고요. 이 박스권에는 태반 쪽방살이, 전·월세입자가 살았었습니다. 모두 밀려났죠.

염리동 철거 현장을 두루 다니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염리’ ‘소금길’이 갖는 성서적 메시지에 마음이 더 끌렸죠. 동네 철거 전 등마루 예배당이 랜드마크처럼 지키고 있어서 참 아름답다 생각해 꼭 한 번 들르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석양이 좋았거든요.

소금길 마을은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처럼 폐허 그 자체입니다. 몇 년 전 조성된 소금길의 예술적 조형물들도 훼손됐고, 마을 안 작은 교회들 역시 흔적도 없이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6·25 직후 피난민들이 모여 시작된 랜드마크 예배당만 덩그러니 남았어요. 염리동에서 가장 큰 교회입니다. 앞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 배후 교회가 될 겁니다.

그날 일부 남은 소금길의 작은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잘랐습니다. 주인 미용사가 교인이더군요. 철거 전 한 동네 살았다는 아주머니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제 머리를 손질합니다. 그 아주머니는 수십 년을 세입자로 살았으나 철거되는 바람에 서울 은평구로 밀려갔답니다. 염리동 셋방살이하는 이들 대개가 그 지역이나 인근 경기도 고양시 변두리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모교회에 출석하긴 해야겠는데 교통편도 좋지 않고 여러 가지가 걱정이에요. 출근길도 너무 멀고요. 허름하긴 해도 신앙생활하기 좋은 동네였잖아요.” “그런 교우들 한두 분이 아니에요.” 두 분이 말을 이어갑니다.

그 얘길 듣자니 신도시 종교부지 불하에서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당첨됐다는 어느 목회자의 상기된 얼굴이 새삼 기억났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그리 됐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어요. 이해는 됐지만 응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들을 심심찮게 대하게 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작 ‘가난한 사람들’은 작품 속 가난한 이들이 ‘못 가진 자’라는 사회경제적 의미를 넘어 ‘가엾은 사람들’이라는 신앙적 시선이 담겼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사랑과 파멸을 다룬 작품이죠. 긍휼의 하나님이 쫓겨난 가엾은 이들을 보호하실 겁니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종교국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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