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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란 착각

입력 2017-07-27 20:25:01
다음 달 15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의 한 장면. 영화는 인간처럼 똑똑해진 유인원이 인류와 갈등을 빚는 이야기다. 동물도 상당한 지능을 지녔다는 신간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는다면 이 영화의 스토리가 허황되게 여겨지진 않을 것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칼라 나투라이(scala naturae)’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직역하자면 ‘자연의 사다리’다. 이 사다리의 맨 위에 자리잡은 종(種)은 인간이다. 그 아래엔 포유류 조류 어류 곤충 연체동물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다리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천지간에 가장 우수한 종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동물이 인간 못지않게 똑똑하고 감정도 지녔다는 사례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어떤 동물은 권모술수에 능해 잇속을 차리거나 상대를 속이는 데 특출한 능력을 보여준다. 반면 동료를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동물도 있다. 동물이 인간과 다른 게 뭔지, 과연 자연의 사다리라는 게 존재하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펴낸 프란스 드 발(69)은 동물의 위상을 끌어올린 네덜란드 영장류학자다. 책의 원제는 ‘우리는 동물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만큼 충분히 똑똑한가?’ 제목만 봐도 동물의 지력을 추켜세우면서 인간의 오만을 꼬집는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특출한 능력을 보여주는 동물들 이야기가 간단없이 이어진다. 가령 1년 전 왕좌에서 내려온 한 침팬지는 우두머리가 되려는 젊은 침팬지의 쿠데타를 돕고, 반란이 성공하자 무리의 막후 실세로 거듭난다. 침팬지가 인간에 버금가는 정치력을 갖춘 셈이다.

학자들은 거울 테스트를 통해 동물이 자아(自我)를 인지하는지 확인하곤 하는데, 테스트를 통과한 동물도 한두 종이 아니다. 침팬지 돌고래 코끼리 까치가 합격 통보를 받았다.

가장 비상한 능력을 보여준 케이스로는 천재 앵무새 ‘엘릭스’를 꼽을 수 있다. 엘릭스는 실험자가 야바위꾼처럼 각각 파스타 조각 여러 개가 들어있는 컵을 잠깐 들어서 보여준 뒤, 조각이 총 몇 개인지 물으면 재빨리 계산해 십중팔구 정답을 맞혔다. 날개를 흔들며 “잘 가”라고 인사하거나, 혀를 내밀어 보이면서 “내 혀를 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7년 엘릭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엘릭스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영특한 동물들 사례를 모은 책으로 예단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몇 걸음 더 들어간다. 동물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인색한 학계 풍토를 뒤엎기 위해 고군분투한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고(思考)에 대한 철학적 논변까지 포갠다.

언어의 문제를 다룬 내용이 대표적이다. 사람들은 사고의 뿌리는 언어라고 여긴다. 동물은 체계적인 언어가 없으니 사고의 둘레가 인간의 그것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저자의 판단은 다르다. “나는 과연 내가 단어로 생각을 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언어가 범주와 개념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사고를 돕기는 하지만, 사고의 재료는 아니라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생각하는 데 실제로 언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즉, 동물이 인간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고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여겨선 안 된다는 것이다. 동물은 ‘현재’에만 몰두한다는, 과거를 반추하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은 없다는 통설을 강하게 반박하는 내용도 비중 있게 실려 있다.

독자에 따라서는 저자가 동물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웬만한 사람이라면 책장을 덮을 때쯤 더 이상 동물을 낮잡아봐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책을 “우리가 특별한 존재라는 개념을 뿌리째 뒤흔든다”고 평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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