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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래 칼럼] 관동대지진을 꼭 기억해야 하는 이유

입력 2017-08-27 18:00:02


“∼ 밤이 됐다/ 다시 촛불과 유언비어의 밤이다/ 깜깜한 거리를 곤봉 흔들며/ 야경(夜警)을 나서나// 여기저기 우물에/ 독을 넣고 다닌다는 사람들이/ 우리를 질책하는/ 신들의 사자라며// 큰 길에서 나는 그 소리/ 묶인 사체를/ 애들이 희롱하는 소리//∼ 니들은 누굴 죽인 건가/ 존엄한 이름 앞세운/ 무시무시한 주문/ 만세 만만세∼.”

일본의 민속학자이자 시인인 오리쿠치 노부오(折口信夫, 1887∼1953)가 1924년 8월 발표한 시 ‘모래먼지(스나케부리) 2’의 뒷부분이다. 1년 전 그가 직접 목도한 살육의 현장을 참담한 마음으로 회상한다. 23년 9월 1일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를 강타한 규모 7.9의 대지진, 이른바 ‘관동대지진’ 직후 벌어진 조선인 집단학살을 비난과 야유로써 고발한 시다.

오리쿠치는 9월 3일 밤 지방에서 요코하마에 도착해 꼬박 하루를 걸어 도쿄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강진의 폐허 속에서 두 번의 밤을 맞으면서 그는 광기 어린 자경단의 행패를 똑똑히 보았다. ‘만세 만만세’는 그들에 대한 조롱이다. 유언비어로 미쳐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차라리 학살당하는 조선인이 되고 싶다’(‘모래먼지 2’ 앞부분)고 절규했다.

그는 반체제 인사가 결코 아니다. 45년 패전 당시 그는 일본의 국가신도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국학원대(國學院大) 종교연구실 주임교수였다. 사실상 일본의 중심축을 다져온 이들 중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만큼 사태가 심각했던 것이다.

학살은 계획적이었다. 대재난으로 민중의 불만이 고조될 것을 우려한 행정당국이 불만해소의 출구를 마련한 것이다. 내무성은, 조선인들이 준동할 수 있으니 지역마다 주도면밀한 경계를 펴고 조선인들을 엄밀하게 단속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전문을 각 지역에 타전했다. 이후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등의 유언비어가 쏟아졌다. 분명한 관제 유언비어다.

조선인들은 6000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다. 희생자 중에는 조선인으로 오인된 중국인·일본인들도 적잖았다. 노골적인 배외주의가 대재난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공동체 외부를 배제해서라도 공동체 내부의 안정을 찾겠다는 극히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일본사회의 배외주의는 지금도 횡행한다. 2000년대 들어 일본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혐한(嫌韓)시위’, ‘헤이트 스피치(증오발언) 데모’가 그렇다. 한류 붐을 타고 한국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확산됐지만 그 반동으로 재일한인에 대한 차별발언이 조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혐한시위를 주도하는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회(재특회)’의 증오 넘치는 언어폭력은 관동대지진 때의 유언비어와 다를 바 없다.

물론 반 재특회 움직임도 있다. 2013년 재일한인과 양심적인 일본시민사회가 연대하여 ‘반(反) 혐한시위 네트워크(노리코에 네트)’가 결성됐다. 2014년 일본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 격)는 교토 조선인학교에 지속적으로 증오의 언어폭력을 자행한 재특회에 대해 1200만엔의 벌금형을 확정하기도 했다. 이어 지난해 일본중의원에서는 특정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를 제한하는 법률을 마련했다. 다만 이 법률은 처벌규정이 없어 한계가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도 혐한시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요즘 재특회는 일본정부가 재일한인들에게 갖가지 특혜를 제공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날조된 주장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이 사실무근이라는 일부 일본학자들의 역사수정주의 논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둘 다 뿌리 깊은 배외주의가 근본 배경이다.

우리가 1923년 관동대지진을 꼭 기억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와 한국정부는 이에 둔감한 듯 보인다. 혐한시위 등 일본 내 혐한 분위기에 자존심 상해하고 분노하면서도 정작 재일한인 사회가 겪고 있는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재외동포의 오랜 수난, 치유되지 않은 아픔과 그로 인한 불안·공포에 대해 눈감고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가 꼭 새겨야할 대목이다. 참된 해방을 향한 우리 내적인 노력과 더불어 재일한인을 비롯한 재외동포의 눈물어린 역사와 고통을 꼼꼼히 점검하고 풀어가야 한다. 이는 새 정부의 적폐청산만큼이나 중요하다. 감정적인 대응을 최대한 자제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를 좇는다는 각오로 임했으면 한다. 역사 앞에 겸손할 때 우리의 주장과 설득에는 비로소 힘이 실린다. 광복절의 8월을 보내며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94주년을 새로 맞는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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