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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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이명희] 家臣

입력 2017-08-28 18:00:01


백과사전을 보면 가신(家臣)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나라의 대부(大夫) 밑에서 벼슬한 사람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족국가시대에 왕이나 대가(大加)들이 가신을 두었다. 고려 무신정권시대 최충헌이 자기 집에서 나라의 정사를 맡아보고 있을 때 임금의 신하와는 별도로 자기 집안에서만 일 보는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서 유래해 세력가 밑에서 일하는 사람의 의미로 쓰이게 됐다.

1704년 에도시대 오이시 구라노스케를 비롯한 47인의 사무라이들은 주군 아사노를 죽게 한 기라의 목을 베어 주군의 무덤 앞에 바치고 할복자결한다. 국내 재벌 총수들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가신들의 충성심도 이에 못지않다. 총수를 대신해 감옥을 가기도 한다. 가신들은 흔히 ‘가방모찌’(가방을 들고 다니며 시중 드는 사람)로 불리는 비서실장 출신들이 많다. 총수의 사생활이나 재무상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가(家)는 가신들의 두뇌 싸움에 흥망이 엇갈렸다. 과묵한 정몽구 회장이 2000년 ‘왕자의 난’ 때 현대차를 사수하고 세계 5위의 자동차회사로 성장시킨 것은 똑똑했던 가신들 덕분이다. 정 회장과 같은 경복고 사단인 유인균, 이계안, 정순원 등이 그들이다. 반대로 본인이 똑똑했던 정몽헌 회장은 이익치, 김재수, 김윤규 등 가신 3인방이 정세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자의 난’ 도화선이 된 것도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의 인사 발령 때문이었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1959년 참모들을 모아 비서실을 만들고 계열사 재무·인사를 총괄하게 했다. 소병해씨는 1978년 36세에 비서실장 자리에 올라 12년간 삼성의 2인자로 군림했다. 이건희 회장 때는 재무통인 이학수 비서실장이 1997년부터 2008년까지 곁을 지켰다. 그는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때와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 때 힘든 시간을 보냈다.

최지성 삼성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과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이 엊그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 공여 1심 재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최 전 부회장은 ‘이재용의 가정교사’, 장 전 사장은 ‘삼성의 제갈량’으로 불린다. 이들은 이 부회장을 구하기 위해 “책임을 묻는다면 늙어 판단력이 흐려진 제게 물어 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심 재판에서는 그들의 호소가 받아들여질까. 그리고 가신들의 시대는 막을 내리는 것일까.

이명희 논설위원, 그래픽=이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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