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가 되면 삶에 여유가 생길 줄 알았어요. 일회용 컵 들고 뛰어다니지 않고 우아하게 커피 잔 놓고 마실 수 있을 것 같았죠. 근데 웬걸. 20대 때보다 더 바쁜 거예요. ‘난 왜 이렇게 아직도 위태위태하지’ 불평을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이제껏 내 인생에서 안정과 여유를 추구한 적은 없었지.”
18년차 배우 문소리(43)가 신인감독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크고 작은 영화 30여편으로 관객을 만난 그가 연출작을 내놓는 건 처음.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위험 부담이 크더라도 일단 베팅한다. 그러면 기분 좋은 호르몬이 나오고 해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과정이 어려우면 그만큼 만족감도 크다”고 미소를 지었다.
오는 14일 개봉하는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며느리로, 딸로, 엄마로, 아내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중견 여배우의 평범한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다.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고 어쩌면 시시해보일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 문소리가 연출하고 각본을 쓰고 주연까지 맡았다. 그가 연기한 주인공의 이름 역시 ‘문소리’다.
극 중 등장하는 여배우의 삶은 녹록지 않다. 결혼하고 나이 들수록 원하는 배역에 캐스팅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1년에 한 작품이라도 하면 다행. 때로는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고, 병원비를 깎아보려는 엄마의 ‘민원’에 못 이겨 치과 홍보 사진을 찍기도 한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난 ‘아재’들에게 ‘외모 지적질’을 당하는 일은 다반사다.
“많은 여자 선후배 동료들이 예고편만 보고도 ‘완전 공감되더라’ ‘영화 보고 울지도 몰라’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줘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영화를 본 한 여성 관객 분이 해주신 얘기였어요. ‘저는 직장 다니며 애 키우는 사람인데, 여배우 얘기인 줄 알았더니 제 얘기더라’고. 그 말이 참 기분 좋았어요.”
영화 속 이야기는 모두 ‘픽션’이다. 하지만 100% 자신의 진심이 담겨있다는 게 문소리의 말이다. “배우는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직업이에요. 여차하면 상황 파악도 못 할 수 있죠. 듣는 말이 워낙 많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이번 작품은 저에 대해 배우고 공부하는 계기가 됐어요.”
‘여배우는 오늘도’는 2013년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 입학한 문소리가 2년간 연출 공부를 하며 만든 단편 ‘여배우’(2014) ‘여배우는 오늘도’ ‘최고의 감독’(이상 2015) 세 편을 묶어 완성한 장편이다. 그는 “보통 연기를 하면서 의심이 들 때마다 감독님과 대화하며 풀어가는 편인데, 나 혼자 모든 걸 다 해내려니 너무 외로웠다”고 고백했다.
감독의 길을 계속 가겠다는 욕심은 별로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으면 또 만들어 볼 수도 있다”는 정도다. 다만 영화계 발전을 위한 활동에는 계속 힘쓸 생각이다.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문소리는 신인배우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단편영화 제작기를 담는 JTBC 새 예능프로그램 ‘전체관람가’ 진행자로도 나섰다.
“저는 데뷔 때부터 많은 혜택을 받아왔어요. 좋은 영화인들의 가르침과 훌륭한 감독님들의 사랑 안에서 성장했죠. ‘갚아야지’ ‘나눠야지’라는 생각이 늘 있어요. 지금까지보다 좀 더 재미있게 사고도 치고 일도 벌이고 싶어요. 물론 내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연기예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한국영화를 위해서도 애써야죠. 내가 일하는 직장이고, 그 울타리 안에 내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