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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노트] 그 사람이 오늘 밤 죽는다면

입력 2017-09-08 18:05:01
르네 마그리트 ‘향수’


십수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환자가 있다. 입원해서 치료받던 중년 여성이었는데, 그녀의 마른 몸과 광대뼈가 도드라졌던 얼굴 생김,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높고 빠른 말투까지 글로 다 묘사하긴 어려워도 머릿속에서는 동영상처럼 리플레이할 수 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매일 상담하고, 최선의 약을 처방했지만 “우울하다”며 초조해하던 증상은 쉬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길게 상담하고 치료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약의 효과였는지, 시간과 정성을 쏟았기 때문인지 증상은 서서히 사라졌다. 퇴원할 만큼 좋아졌다고 판단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녀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생을 끝내고 말았다.

어떻게 했어야 자살을 막을 수 있었을까? 조금 더 입원하도록 설득하고, 더 열심히 상담하고, 더 꼼꼼하게 챙겼어야 했나? 내가 놓쳤던 것은 없었을까 하고 그때의 상황을 더듬게 된다. 죽은 이는 영원히 떠나버렸고, 안타까움과 회한으로 만들어진 기억의 철창에 나는 갇혀 버렸다.

종종 이런 상상을 한다. ‘지금 만나고 있는 이 사람, 전화 통화하고 있는 이 사람이 오늘 밤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끔찍한 상상을 왜 하느냐”며 언짢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나의 말과 행동을 알게 모르게 변화시킨다. 누군가를 만났다 헤어질 때, 그것이 이생에서의 마지막 만남이라면 허투루 대할 수 없다. 작별의 인사도 건성으로 하면 안 된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쉽게 뗄 수 없게 된다. 소중한 사람에게는 더 따뜻하게, 성가신 사람에게는 조금 더 관대해진다. 친절하지는 못하더라도 무례는 범하지 않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생각하면, 나누어야 할 사랑은 더 커진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다’라고 생각하며 의도적으로 ‘죽음 현저성(mortality salience)’을 자극하면 한순간도 그냥 흘려버릴 수 없게 된다. 찰나가 보석이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된다. 돈과 권력, 명예는 부질없다. 건강과 행복, 가족만 남는다. 뒤로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그것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나의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은 더 소중해진다.

김병수(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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