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전체메뉴보기 검색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낭독의 즐거움

입력 2017-09-14 17:35:01


이번 학기에는 옛이야기에 대한 강의를 한다. 사회교육대학원이라 학생들은 나이가 좀 있는 사회인이 대부분이다. 종일 일한 뒤 저녁에 또 두어 시간을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니 피곤하고 배고프고 졸린 게 당연하다. 수업보다는 휴식과 간식에 더 마음이 가는 게 인지상정이다. 나는 가능하면 편안하고 재미있고 활기찬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다. 배고프지 않은 시간은, 학생들이 순번제로 간식을 장만해오는 걸로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재미있는 시간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 읽어온 이야기를 설명하는 순서에 설명 대신 공동 낭독을 시작한 것이다. 세 인물의 아주 짧은 대화가 대단한 속도감으로 이어지는 ‘똑똑한 한스’라는 이야기. 지문 담당까지 합해 네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울려나왔다. 낭독에서는 눈으로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생동감이 피어난다. 종이 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문장은 사람의 숨이 실리면 구체적인 양감과 질감을 갖추고 꿈틀꿈틀 부풀어 오른다. 그렇게 문자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현장이 낭독의 시간이다.

‘똑똑한’이라고는 하지만 한스는 너무나 멍청한 짓을 되풀이한다. 뭐야, 제목을 바보 한스라고 붙였어야지. 그런데 결말에 이르면 상식적으로 똑똑하게 구는 것보다 더 수지맞는다. 똑똑한가 했는데 바보고, 바보인가 했더니 사실은 똑똑한 입체적인 인물, 그의 반전 인생이다. 지당한 타이름을 퍼붓지만 언제나 뒷북만 치는 엄마. 하지만 엄마의 뒷북 잔소리가 한스를 계속해서 그레텔에게 보낸 셈이니 공로가 지대하다. 엄마의 잔소리에 감사히 따를 일이다. 한스의 바보짓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부추기는 그레텔. 그녀는 결국 한스에게서 난폭할 정도로 박력 넘치는 프러포즈를 끌어낸다. 그레텔은 처음부터 한스를 사랑했다고 봐야 한다. 한스의 바보짓을 종국에는 수지맞는 인생 득템으로 변화시킨 것이 그레텔의 사랑이다. 눈으로 읽기만 했을 때는 잠겨 있던 해석들이 학생들의 목소리에 이끌려 솟아나온다. 한스도 그렇지만, 나도 수지맞은 거 아닐까.

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