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전체메뉴보기 검색

[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옆집에 살던 ‘광년이’는 어디로 갔을까

입력 2017-09-18 05:05:04

 
무용가 박정호가 최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장애인 국제무용제에서 휠체어를 탄 채 역동적인 춤을 선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장애인 국제무용제 조직위원회 제공
 
전은선 발레단 공연의 한 장면. 대한민국 장애인 국제무용제 조직위원회 제공
 
춤추는은평재활원 공연의 한 장면. 대한민국 장애인 국제무용제 조직위원회 제공


머리에 꽃을 꽂은 ‘광년이’ 아이콘은 2000년대 초 발표된 ‘야, 이노마!’라는 만화에서부터 출발했다. 머리의 꽃뿐만 아니라 몸뻬 바지 위로 속치마를 꺼내 입는 초현실주의적 패션을 구사했던 광년이는 이름이 암시하는 그대로 지적 장애인이다. 그녀는 남자친구 이노마를 좋아하고, 삐꾸 땡삐 등 평범한 동네 남아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여일(강혜정)도 머리에 꽃을 꽂은 지적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동네 주민 모두가 사랑하는 만인의 자식이기도 했다. 이것은 픽션이 아니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함께 사는 이웃이었다. 바보라는 놀림을 당하기도 했겠지만, 여일처럼 공동체가 보살피는 존재였다.

어딜 가도 볼 수 있었던 광년이와 같은 친구들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이웃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타인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수용소에 격리되거나 자의로 고립과 감금의 삶을 살아간다. 과거에는 온 마을이 더불어 보살폈던 존재들을 지금은 그 가족들만이 책임진다. 타인의 따가운 시선도, 그들로 인해 공동체에 불이익이 생길 때마다 터지는 비난도, 모두 그들이 감수해야 할 몫이다.

이런 사회 인식의 변화를 미셸 푸코는 ‘생체 권력’이 작동한 결과로 보았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화 이후 국가 권력은 자본주의의 원동력인 노동력을 통제하고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국민들의 신체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권력이 추구한 것은 신체의 표준화였다. 생산에 적합하고 통제가 용이한 표준형 인간을 모범적 전형으로 제시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비정상’으로 구분해서 강제적으로 배제 또는 격리시켰다. 그중에는 지체장애인은 물론 지적장애인 실업자 부랑자 빈민들도 포함됐다. 이 과정에서 과거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인권유린적인 ‘생체 권력’의 작동을 인식한 서구사회는 ‘비정상’으로 구분된 국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도입했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교육 분야이다. 영국과 독일은 장애인들을 격리하는 대신 일반 교육 기관에서 함께 교육한다. 그들의 사회 적응을 위해 모든 학교에 특수교육 전문가를 의무적으로 배치한다. 통합 교육은 장애 아동들의 사회참여를 격려할 뿐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일반 아동들의 인권적 감수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한 나라의 문명 수준은 경제력이 아니라 그 나라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서울 한 지역에서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둘러싼 갈등은 아직도 생체 권력에 세뇌되어 있는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특수학교 대신 한방 학교를 짓자고 제안하며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라는 데서 참담함은 더해진다.

다행히 반대편 노력 또한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고, 예술계도 마찬가지다. 지난 7일부터 9일까지 국립극장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장애인 국제 무용제는 올해로 2회째를 맞는 세계 유일의 장애인 무용제이다. 이 공연의 백미는 장애인·비장애인 예술가들의 협업 무대였다. 전은선 발레단을 비롯해 엄재용, 용기, 최예은과 같은 한국의 대표 무용수들과 시각 장애인들의 컬래버레이션은 감금되어 있던 나와 다른 육체의 소유자에게 손을 내미는 배려를 넘어 동등한 눈높이에서 ‘다름’과 ‘같음’을 확인하는 무대였다. 협업 무용수들의 유명세 덕분에 가장 작은 별오름 극장에서의 공연은 사흘 공연 모두 전석 매진을 기록했고 관객들은 기대 이상의 뜨거운 감동을 얻었다. 아직 세상은 아름답고 따스하다고 믿고 싶게 만드는 의미 있는 기록이다.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