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웃음이 많은 할머니. 첫인상은 그랬지만, 금세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흐른다. 춤 동작을 선보일 땐 마른 몸 어딘가 감춰진 단도가 튀어나오듯 했다.
무용계의 대모 배정혜(73). 그가 돌아왔다. 국립무용단이 21∼24일 선보이는 신작 ‘춘상’ 안무가로 호출한 것이다. 11년 만이다. 한국 무용 매진 신화를 쓰고 있는 아트디렉터 정구호가 연출한 이 창작 무용극은 한마디로 젊다.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청춘 남녀의 활력이 넘친다.
지난 6일 서울 중구 남산 자락 국립무용단 연습실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이 젊은 무대를 하필 70대의 그에게 맡겼을까. “정구호 선생에게 물어봤어. 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에게 가장 발랄한 안무를 맡기냐고. 그랬더니 가장 어린 춤을 만들어낼 분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나는 평생 새로운 작품을 올릴 때마다 스타일을 바꿨다. 그래서 나를 부른 게 아닐까” 하고 부연했다. 그는 2006년 재즈와 전통 춤을 결합시킨 ‘Soul, 해바라기’를 안무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후 후진을 위해 물러났다.
춘상의 안무는 파격적이다. 파티장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춘’이 긴 머리를 배우 전지현마냥 홱 돌리며 등장하는 ‘머리채춤’이 그렇다. 춘향전의 21세기 버전이라 할 춘상은 고교 파티장에서 만난 남녀 ‘춘’과 ‘몽’이 사랑에 빠지지만 부모 반대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이야기. 무대 전반에 힘찬 기운을 불어넣는 ‘발춤’은 탭댄스에서 힌트를 얻었다.
“처음엔 내 나이에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이지수 음악감독이 편곡한 대중음악을 하나하나 고르며 상상하니 아이디어가 막 나오더라고요.”
후진을 위한 조언을 구했다. 그는 “젊은 안무가들이 전통을 현대화했다는 춤을 몇 편 봤다. 작가정신으로 재창조하는 춤이어야 하는데 아이돌 춤을 그대로 올리더라. 저건 아니다 싶었다”고 말했다.
춘상에는 70대가 안무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유치한’ 사랑놀이도 나온다. ‘사랑 듀엣’에서 남자친구의 이마를 친다거나 물을 튀기는 동작 같은 것들이다. “일부러 그랬어. 춤을 보던 20대들이 무대로 뛰쳐나와 같이 추고 싶은 춤을 안무하고 싶었어요. 아이돌 공연 보면 객석에서 흔들고 그러잖아요.” 그는 “이번에 정구호 선생님이 무대 장치로 눈을 즐겁게 하고, 나는 가슴을 뜨겁게 하는 춤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배 선생은 세 살 때부터 춤을 시작했다. 다섯 살에 장추화무용연구소에 최연소자로 입문했고 열두 살에 첫 개인발표회를 할 만큼 춤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1977년부터 ‘타고 남은 재’가 주목받으며 안무가로 돌아섰다. 모던 춤, 창작 춤이 흔하지 않은 때 전통을 현대화한 창시자다. 국립국악원 상임안무자, 시립무용단장, 국립무용단장을 지내며 안무와 행정으로 보폭을 넓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