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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人터뷰]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소외된 사람 한 명도 없도록 ‘따뜻한 보훈’ 정책 펼칠 것”

입력 2017-09-27 05:05:05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앞으로 5년 동안 추진해야 할 핵심 과제 중심으로 '따뜻한 보훈' 로드맵을 만든 게 지난 4개월간의 가장 큰 성과"라며 "단지 보상금을 주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훈 대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눈높이를 맞추며 사람 중심의 따뜻한 정책을 펴나겠다"고 말했다. 윤성호 기자






야간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여군 장교 모집 공고 포스터를 봤다. 당시만 해도 여성이 시험이나 공개채용 절차를 거쳐 취직하는 경우가 드문 시절이었다. 교사들은 돈이나 연줄로 종종 들어가기도 했는데 사범대를 나왔지만 군인 출신의 대쪽 같은 아버지 밑에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군이라면 계급 안에서, 군복 안에서는 평등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군에 지원했다. 군복을 좋아했고 군대와 결혼했다.

27년 군에 복무하면서 부당한 여성 차별에 반기를 들고 불합리한 제도와 싸웠다. 동료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오뚝이’ ‘피닉스(불사조)’. 피닉스는 첫 여성 헬기 조종사인 그의 항공 호출명이기도 하다. 2002년 유방암 수술을 받으면서 양쪽 가슴을 절제한 것이 빌미가 돼 2006년 강제 전역됐다. 이후 국방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내 1년7개월 간의 지난한 싸움 끝에 2008년 복직했다. 1961년 보훈처 설립 이래 최초의 여성 국가보훈처장이 된 피우진(61) 예비역 중령 얘기다.

문재인정부 내각 인사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파격적인 인사를 꼽으라면 단연 피 처장 임명일 것이다. ‘짜릿하고 감동적인 인사, 역대급 홈런’, ‘문재인 대통령의 신의 한 수’란 호평들이 쏟아졌다. 가을 햇살이 곱게 내리비치던 지난 21일 여의도공원에서 피 처장을 만났다.

-보훈처장에 임명된 지 4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중점을 둬서 한 일이 있다면.

“보훈가족들에 대한 국민들의 따뜻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취임 후 처음으로 치른 5·18 기념식이나 현충일 등의 큰 국가적 행사에서 대통령과 국민들이 다 함께 참여해 그날의 주인공들을 생각하며 가슴 뭉클한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주력했다. ‘따뜻한 보훈’을 기치로 제도나 보상 중심의 보훈정책과 함께 ‘보훈복지’ 개념을 강화하는 데도 노력했다. 특히 소외된 분들을 예우하기 위해 생존 애국지사 특별예우금과 참전유공자에 대한 참전명예수당을 대폭 인상하고, 국가유공자 보상금도 지난 8년간 최고 수준으로 인상해 내년 정부 예산안에 반영했다.”

-현 정부 들어 장관급 부처로 격상됐다. 앞으로 계획은.

“어깨가 무겁다. 240만명의 보훈가족 중 한 명도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따뜻한 보훈’ 정책을 추진해 나가려 한다. 국가유공자 예우 강화를 위한 보훈예우국과 보훈단체 관리·감독 강화를 위한 보훈단체협력관을 신설하고 현장 복지서비스 인력도 충원하겠다. 보훈가족들이 존경받고 사랑받는 보훈문화를 만들어가려 한다. 6·25전쟁 참전국과 참전용사를 위한 감사행사, 참전용사 후손 지원사업 등 보훈외교도 강화하려 한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네덜란드 용사가 부산 유엔공원에 동료들과 함께 안장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엊그제 유해 봉환식이 열렸는데.

“2015년부터 유엔 21개국 참전용사가 부산 유엔기념공원 등 한국에 안장을 희망할 경우 유해 봉환식을 거행하고 있다. 오는 11월에도 프랑스 참전용사가 한국에 안장될 계획이다. 유엔참전용사의 명예선양 및 유엔참전국과의 우호증진에 관한 법률 제정도 추진하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가 진행 중이다. 국방부뿐 아니라 보훈처도 할 일이 많을 듯하다. 다른 과거사 부분도 조사하고 보상할 부분이 있는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민주화운동유공자로 등록되는 분들에 대해 최선을 다해 예우할 것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나 6·25전쟁에 참전했던 분들 중 아직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지 못한 분들이 많다. 이들을 발굴하는 데도 노력하겠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현행 10월 1일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군 기념일(9월 17일)로 바꾸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2000년 이후 4번째다. 어떻게 보는지.

“국군의 날 주관 부처와 기념일 관련 법령을 총괄하는 관련 부처의 입장이 정리돼야 한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보훈처가 예우하는 독립관련 단체들의 주장을 관계 부처에 전달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이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려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30%를 여성 각료로 채우고 임기 말까지 남녀동수 내각을 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국가 의사결정 과정에 여성의 참여가 확대되는 것은 정말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외연적인 확대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여성성’이 가진 섬세하고 내밀한 관점으로 조직의 문화, 업무절차, 제도와 정책을 개선하는 것이다. 여성성이 가진 커뮤니케이션 강점이나 다양성을 바라보는 융합의 강점들을 여성 장관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발휘하면서 사회통합과 소통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특히 국회나 각료들을 보면 여전히 남성 중심의 문화가 있다. 이런 편향된 문화가 사회 다양성과 통합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균형 있는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군대 내 여권신장을 위해 싸워왔다. 술자리에 상관이 부르자 부하 여군에게 전투복을 입혀 내보낸 일화가 유명하다.

“여러 번 거절을 하다가 여군이 똑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전투복을 입혀 보냈다. 당시 저는 군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대 내에서 여군을 바라보는 변화의 계기가 됐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아직도 여군이 성폭행 등으로 자살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대다수 여성의 상관이 남성이고 이들 남성들이 ‘부하 여군, 동료 여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하지 못한 탓이라고 본다. 사관학교나 교육기관에서 여자 생도와 함께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7% 미만의 소수다. 한 조직의 10%도 안 되는 소수자로서 여군은 다수 남군과 문화적 분리현상을 일으키게 되고, 이 분리현상이 도리어 성폭력 등의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여군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바뀌도록 군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여군이 소수자 문화를 벗어나서 일상적 주류 문화에 편입할 수 있도록 인력 규모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얼마 전 청와대 청원사이트에 여성징병제 청원이 올라왔다. 이스라엘과 노르웨이 등 10여개국이 시행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는지.

“의무화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때는 여군 비율이 1%도 안 됐다. 지금은 7% 미만인데 15% 이상은 돼야 한다고 본다.”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어땠나.

“암인데도 불구하고 큰 걱정 없이 수술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생각한 대로 되는 것 같다. 의사에게 수술 후 언제 군에 복귀할 수 있는지 물었다. 빨리 군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피 처장은 2006년 펴낸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란 저서에서 ‘군 생활 중 가장 불편한 것 중 하나가 가슴이었다. 직업상 백해무익(?)한 가슴을 이 참에 없애고 싶다’며 암이 발생한 부위뿐 아니라 양쪽 가슴을 일부러 제거했다고 썼다. 그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장애 판정을 받아 강제 전역됐다.

-복직 투쟁이 힘들었을 것 같다.

“유방암이 다 치료되고 아픈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군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많이 힘들었다. 제도적으로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복직 과정은 제 개인적인 권리를 찾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군 내부의 인권 향상을 위해 싸운 과정이기도 했기에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똑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아마도 그때와 같이 행동을 할 것 같다.”

-살아오면서 후회스런 일이나 보람 있는 일이 있다면.

“군인이 된 것에 대해 후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불합리한 제도에 대해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시기에 마침 국가에서도 군에 지원하는 여성인력에 대해 임무를 줘보자 시도하는 단계에 있었다. 처음 헬기 조종사가 됐을 때, 임무를 수행할 때 보람이 있었다.”

-스스로 정의하는 피우진은 어떤 사람인가.

“매사 단순명료, 명쾌하게 살아가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업무는 고리타분할 정도로 원칙을 중시한다. 법이나 제도, 규정 등 사람이 또는 사회가 서로 합의하고 약속했으면 어떤 개인적 불이익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원칙을 지키는 과정을 누군가는 정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는 사회적 정의의 편에 서고 싶다.”

-희망이 있다면.

“후배들이 편안하게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후배들이 저를 떠올릴 때 후배 스스로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편안히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피 처장은 2009년 중령 전역식에서도 가수 방미의 ‘날 보러 와요’를 불렀다.

조심스럽게 촌스런 질문을 하자 “1촌을 말하나요?” 하며 웃었다.

“당시에는 여군 장교는 결혼은 해도 되지만 아이를 낳으면 전역해야 했다. 부사관은 결혼도 하지 못했다. 바빠서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영내 생활을 해야 했고 헬기 조종사 시절에도 옆 사람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

만난 사람=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사진=윤성호 기자

■피우진은

1956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청주대 체육교육학과를 나와 1979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특전사 중대장을 거쳐 1981년 육군 항공학교 첫 여성 헬기 조종사가 됐다. 1군사령부 여군대장, 항공학교 학생대 학생대대장을 거치며 25년간 1300여 시간 비행기록을 세웠다. 2008년 6월 항공학교 교리발전처장으로 복직했다가 2009년 9월 정년에 의한 전역을 했다.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2008년 18대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2015년부터 올해 5월까지 국가인권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여군 인권향상을 위한 예비역 여군모임인 '젊은여군포럼' 대표로 활동하며 지난 4월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2008년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성평등 디딤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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