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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융단·노란 물결이 빚어낸 황홀한 풍경

입력 2017-09-27 22:30:01
전남 영광군 불갑산 자락 꽃무릇이 매혹적인 붉은 융단을 펼쳐놓고 있다. 이른 아침 햇빛이 스며든 꽃무릇 군락지가 황홀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염산면 천일염전. 소금밭에서 ‘바다꽃’이 피어난다.
 
설도항 기독교인 순교탑. 학살 현장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해질녘 대덕산에서 내려다본 와탄천과 한시랑뜰. 노란 벼들이 익어가는 들판이 물돌이와 함께 환상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굴비


가을로 접어든 전남 영광은 매혹적인 붉은색, 황홀한 노란색으로 다가선다. 불갑산(516m)으로 접어들면 초록빛 숲 그늘에 꽃무릇이 붉은 융단처럼 깔려 있고, 법성포구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빨간 꽃무릇과 마주하며 그리움의 대상을 잠시 꺼내보고,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보며 마음을 넉넉히 키울 수 있다. 산과 들과 바다가 조화롭게 펼쳐진 풍요로운 영광으로 가을나들이를 나서보자.

꽃무릇. 보통 9월에서 10월까지 붉은색으로 꽃을 피운다. 길고 말쑥한 연두색 꽃대 위에 붉은색 가느다란 꽃술이 사방으로 치켜 올라간 모습이 화려한 왕관을 닮았다. 꽃잎보다 훨씬 길게 뻗은 꽃술은 붉은 마스카라를 칠한 여인의 속눈썹처럼 유혹적이다.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꽃과 잎이 평생 만나지 못하는 운명을 뜻하는 말이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꽃이 떨어진 다음 녹색 잎이 나온다. 잎과 꽃이 서로 그리워한다고 해 ‘상사화’라 불리기도 한다.

불갑산 자락은 국내 최대 꽃무릇 군락지다. 등산로와 개천가에도 꽃무릇이 지천이다. 울창한 숲 속 평지 꽃밭이 주는 매력이 있고, 완만한 언덕이 주는 리듬감도 있다. 꽃무릇 군락지 위로 볕이 들면 음영이 생기며 황홀경을 연출한다. 꽃밭과 주변을 에워싼 나무들이 풍경을 더한다.

불갑산은 노령산맥 서남쪽 끄트머리 전남 함평과 영광의 경계에 솟아 있다. 본래 이름은 모악산. 산세가 부드러워 ‘산들의 어머니’라는 뜻에서 얻은 이름이다. ‘모악’이란 이름은 옆에 있는 산에 넘겨줬지만 그 산세는 변하지 않았다. 작은 체구에 비해 호랑이와 맹수들이 살았을 정도로 깊고 험하고, 6·25전쟁 당시 빨치산의 은신처가 될 만큼 수림도 울창했다.

불갑산 등산로 초입에 불갑저수지가 있다. 맑은 수면에 초록빛 산과 붉은 꽃무릇이 비친다. 맞춤한 듯 뽀얀 안개라도 내리면 더할 나위 없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꽃무릇은 깊은 산으로 이어진다. 동백골, 연실봉을 거쳐 돌아오는 4.5㎞ 코스를 타면 꽃무릇의 자태를 만끽할 수 있다. 약 1시간 30분 소요된다.

숲 그늘 짙게 드리운 동백골은 완만한 산책길이다. 천연기념물 제112호 참식나무 자생지이자 북방한계선이다. 연실봉은 봉우리가 연꽃 열매처럼 생겼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산정은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다. 해보면(面) 들판 건너 산릉이 겹겹이다. 해 뜰 무렵 연실봉에 오르면 운해(雲海)가 장관이다. 연봉 사이로 바람에 밀려가는 구름이 바다를 이룬다. 한 폭의 수묵화나 다름없다.

법성포는 서해가 육지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천혜의 항구다. 그 곳에 숲쟁이공원, 굴비거리 등이 있다. 숲쟁이의 ‘쟁이’는 재(고개)를 이르는 말로, 풀이하면 ‘숲이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 법성진성이 있는 인의산 언덕에 포구를 지키는 방풍림으로,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100여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뤄 명승 22호로 지정됐다.

법성포 끝자락의 대덕산(303m)에 오르면 법성포와 한시랑뜰 등 사방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한시랑뜰은 법성포와 갯고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들녘이다. 1960∼70년대 갯벌에 제방을 쌓고 소드랑섬 주변을 간척하면서 형성됐다. 와탄천이 휘돌아가며 물돌이 지형을 펼쳐놓는다.

고갯마루에서 대덕산 정상까지는 800m에 불과하다. 길이 다소 가팔라 30분쯤 소요된다. 대덕산 정상에 위치한 대덕정은 법성포 일대를 파노라마로 펼쳐놓는다. 벼가 익어가는 들판이 눈앞에 다가선다. 산자락에 묻혀 보이지 않는 백수해안도로 너머 칠산바다로 해가 지면서 시시각각 장관을 연출한다.

이제 영광의 명물 굴비를 맛볼 차례다. 굴비는 조기를 염장해 말린 건어물로 예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 법성포에서는 천일염으로 조기를 켜켜이 잰다. 손이 많이 갈 뿐 아니라 조기 크기에 따라 간하는 시간을 조절하는 게 까다로워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여기에 적당한 습도와 일조량을 갖춰 굴비 맛은 뛰어나다.

굴비라는 이름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려 인종과 이자겸 관련이다. 왕위를 넘보다가 영광으로 귀양 온 이자겸이 말린 참조기를 인종에게 진상하면서 생선의 이름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굴비(屈非)’라 지어 보냈다는 것이다.

영광에 가면 국도 77호선인 백수해안도로 드라이브가 필수다. 총연장 16.8㎞의 해안도로를 따라 칠산바다의 전경이 아름답게 이어진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가운데 8위로 꼽힐 만큼 매력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도로 곳곳에 노을전시관을 비롯한 낙조 감상 포인트가 여럿이다. 백수해안도로 남쪽 끝에 바둑판 모양의 염전이 펼쳐진다. 영광의 천일염은 미네랄이 많은 서해안 갯벌과 풍부한 일조량, 바람이 빚은 특산품이다.

염산면 끝자락에는 1934년쯤 섬에서 육지로 탈바꿈한 작고 소박한 항구 설도항이 있다. 영광은 6·25전쟁 때 끔찍한 대학살이 벌어졌던 곳. 9·15 인천상륙작전과 미군 진주 소식을 듣고 만세를 불렀던 군민들은 미군이 떠난 뒤 빨치산들에게 피의 보복을 당했다.

설도항에 1948년부터 자리 잡은 염산교회도 학살 현장 가운데 하나다. 피난을 가지 않은 채 신앙터를 지키던 염산교회 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순교했다. 설도항 광장 한쪽에는 학살 현장을 생생하게 새긴 기독교인순교탑이 서 있다.

여행메모

백합·맛조개… 두우리 어촌마을 갯벌 체험

법성포에서 즐기는 ‘영광의 맛’ 굴비 별미


수도권에서 출발하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영광나들목으로 나간다. 호남고속도로는 정읍나들목을 이용, 고창을 거쳐 영광으로 진입할 수 있다. 서울 기준 4시간 정도 걸린다.

불갑산은 영광읍내를 지나 23번 국도를 타고 함평 방면으로 가면 된다. 이정표가 잘 돼 있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법성포는 영광읍내에서 22번 국도로 갈아타고 곧장 가면 된다. 대중교통의 경우 출발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겠지만 광주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백합이나 맛조개를 캐면서 갯벌체험을 하고 싶다면 염산면 두우리 어촌체험마을을 찾아가면 된다. 두우리 갯벌은 자동차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갯벌 인근 해수욕장에서 바위와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의 물보라를 보며 철 지난 바닷가를 거니는 것도 색다른 기분이다.

영광에는 맛집들이 즐비해 입이 즐겁다. 법성포에 굴비정식을 내는 식당들이 몰려 있다. 돌솥밥에 토하젓 얹어 고추장에 썩썩 비벼 먹어도, 굴비 살점에 조기젓 얹어 먹어도 맛이 각별하다. 일번지식당(061-356-2268)이 외지인들에게는 가장 알려져 있다. 만나식당(061-356-2377)은 칼칼하면서 단맛이 도는 조기찌개를 자작하게 끓여낸다.

영광=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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