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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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김혜림] 성평등 ‘스튜핏’

입력 2017-10-18 17:50:02


86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해 결혼을 했다. 당시 5년차 기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터라 모든 결혼 준비는 친정엄마 몫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친정엄마는 ‘모든 살림살이는 국산으로 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세우셨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가전제품 중 가장 덩치가 작은 다리미를 고를 때부터 갈등이 시작됐다. “다리미는 ○○가 최고인데…”로 시작된 고민은 “국산 세탁기는 고장이 잘 난다는데…” “국산 TV는 컬러가 선명하지 않은데…”로 이어졌다.

30여년 전 일이 새삼 떠오른 것은 미국 가전 브랜드 ‘월풀’ 때문이다. 당시 엄마에게 갈등을 안겨주었던 주범 중 하나가 월풀 세탁기였다. 우리나라 주부들이 갖고 싶어 했던 ‘미제 세탁기’ 브랜드 월풀이 한국산 세탁기가 발목을 잡는다며 자기네 나라 정부에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월풀은 지난 6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미국 진출을 막아 달라고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청원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지난 5일 이 청원을 받아들여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생산한 세탁기가 미국 세탁기산업에 피해를 주고 있다는 예비판정을 내렸다. 19일(현지시간) 월풀과 삼성전자, LG전자의 의견을 듣는 ITC의 공청회가 열릴 예정이다. 엄마가 살아계셔서 이 뉴스를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요샛말로 ‘그레잇!’ 하셨을 것이다.

국내 소비자들은 물론 미국 소비자들까지 사로잡을 만큼 품질이 좋아진 국산 세탁기, 지금 누가 쓰고 있을까? 아마도 여전히 여성들이 주사용자일 것이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올해 초 발표한 ‘기혼여성의 재량시간 활용과 시간관리 실태 연구’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가 가사 관리에 쓰는 시간이 남성은 19분인데 비해 여성은 140분이나 된다.

지난 5월부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에 연재되면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웹툰 ‘며느라기’는 이 땅에서의 며느리 노릇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인공 민사린의 남편 무구영의 할아버지 제삿날 광경. 무구영은 거실에서 집안 남성들과 담소를 나누고, 민사린은 주방에서 전을 부친다. 제사를 앞두고 “내가 많이 도와줄게”라는 무구영에게 민사린은 이렇게 말했었다. “날 도와준다고? 구영아, 나는 할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거든. 내가 너를 돕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니?” 결혼하면 남편 가문의 대소사를 ‘나의 일’로 받아들였던 며느리들의 의식은 바뀌었지만 주방 풍경은 변한 게 없다. 그래서 며느리들은 더 괴롭다.

집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두 달 사이 뉴스만 훑어봐도 남녀는 여전히 유별(有別)하다. 공기업인 가스안전공사가 합격권에 들었던 여성 응시자 7명의 점수를 조작해 탈락시킨 사실이 지난 9월 드러났다. “여자는 출산과 육아휴직으로 업무 연속성이 단절되니 탈락시켜야 한다”는 당시 사장의 소신에 따른 조치였단다. 1990년대까지 응시요강 자격란에 있던 ‘군필자에 한함’은 사라졌지만 남성 우대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리천장 역시 공고하다. 2017년 8월 기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기관의 3급 이상 고위 공무원 총 1233명 중 여성은 3.98%(48명)에 불과하다.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이 기재위 소관 기관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다. 다른 기관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평등 현황은 여전히 ‘스튜핏’이다.

정현백 여성부 장관은 취임사에서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노동인구 감소, 노인빈곤 등 사회문제 해결책으로 성평등을 꼽았다. 성평등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런 사회문제들은 더 심화되리란 유추는 자연스럽다. 세계 최고의 세탁기를 만드는 것보다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게 시급한 이유다. 김정은의 핵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전 세계 최하위 수준인 여성 1인당 출산율 1.3명의 대한민국 미래는 어둡다.

페미니스트임을 내세우는 문재인 대통령께 묻고 싶다. ‘성평등 대한민국, 성평등 추진체계 실현’은 어디쯤 가고 있는 건지요?

김혜림 논설위원 겸 산업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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