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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김찬희] 1000원의 가치

입력 2017-10-29 17:55:01


‘띠링’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린다.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문자메시지가 들어온다. ‘자전거(SPB-XXXXX) 대여 완료. 대여소:11XX OOO, 기본대여시간은 12:39까지입니다.’ 안장 높이를 조절하고, 천천히 페달을 밟는다. 이렇게 온전히 나만의 1시간짜리 자전거가 탄생한다.

올해 초쯤 집 앞에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 대여소가 생겼다. 대여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자전거가 꽤 많이 비어 있는 걸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자료를 뒤져보니 인기도 상당했다. 일부 지역에선 출퇴근시간에 없어 못 타는 일도 벌어진다고 한다. 가입 회원은 2015년 말 3만4162명에서 올해 8월 말 23만1259명으로 늘었다.

궁금해졌다. 누가, 왜 타는 걸까. 쉬는 금요일, 짬을 내 ‘따릉이’ 대여소 앞에서 무작정 이용자를 기다렸다. 출근시간대가 지난 오전 10시40분쯤이라 그런지 이미 15대 중에 5대는 대여소를 떠난 뒤였다. 1시간을 서 있는 동안 다섯 명의 시민이 ‘따릉이’를 빌리러 왔다.

50대 직장인 A씨는 간밤에 야근을 하고 늦은 출근을 하는 길이었다. 회사가 있는 종로까지 지하철로 이동하는데, 자전거를 타고 근처 5호선 지하철역까지 간다고 했다. 따릉이를 이용한 건 6개월쯤. “1000원만 내면 손쉽게 빌릴 수 있다. 건강해지는 느낌? 하하. 환경에 도움을 줄 수 있고, 기름도 덜 쓰고, 생각보다 편리하고, 장점이 많아요.” 30대 주부 B씨는 장을 보러 갈 때, 주말에 가족과 공원 나들이를 갈 때 등 평소에 자주 쓴다고 했다. B씨는 미세먼지, 자동차 배출가스 같은 얘기를 하더니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 우리 사회의 가치를 위해 작은 실천을 한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따릉이 사업은 얼핏 지속가능성이 떨어져 보인다. 지난해 이용권 판매수익은 10억300만원인데, 운영비로 42억1900만원을 썼다. 올해 서울시가 책정한 예산은 99억500만원이다. 따릉이 보급을 늘릴수록 적자폭이 커지는 구조다. 적자는 고스란히 세금으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따릉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가치’를 감안하면 손익 계산이 달라진다.

따릉이 사업에 대기업들이 뛰어든다면 어떨까. ‘많은 이윤’ 대신 ‘적정한 수익’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적기업’이 운영하면 어떨까. 광고를 유치하고, 버려지거나 방치된 자전거의 부품으로 따릉이를 만든다면 수익과 비용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을 수 있다. 아이들도 탈 수 있도록 다양한 자전거를 공급하고, 헬멧 등 안전장구까지 빌려주며, 자전거도로를 설계·시공하는 사업으로 범위를 확장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일자리도 창출될 것이다. 이미 유럽 등 선진국에선 사회적기업이 규모와 비중을 키워가고 있다. 전통적 일자리가 사라지고 파괴될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이 대안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우리 기업가 중에서도 사회적경제, 사회적 가치에 주목하는 이들이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오랫동안 사회적기업을 고민해온 최 회장은 지난 20일 ‘SK 최고경영자 세미나’ 폐막식에서 ‘사회적 가치가 포함된 경제적 가치’를 강조했다. 그는 “단순히 경제적 가치만 창출하는 기업은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다”고 강하게 말하기도 했다.

마침 정부도 사회적경제를 키우는 데 적극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일 3차 일자리위원회 회의에서 “사회적경제는 우리 경제가 직면한 고용 없는 성장, 경제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많은 사회적기업이 태어나고, 사회적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면 지금 따릉이가 보여주는 ‘1000원의 가치’를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최 회장의 말처럼 전혀 다른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김찬희 경제부 차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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