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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어찌할 수 없는 사랑도 삶의 선물

입력 2017-11-10 05:05:03
‘내 마음의 낯섦’의 배경이 되는 도시 이스탄불. 주인공 메블루트는 급격한 도시화가 이뤄지는 대도시 이스탄불에서 터키 전통 음료 ‘보자’를 팔며 살아간다. 픽사베이 제공
 
오르한 파묵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할 때 이스탄불을, 이스탄불을 설명할 때 나 자신을 설명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65)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 터키 이스탄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신작 ‘내 마음의 낯섦’(A Strangeness in My Mind)에서 주인공 메블루트의 생애를 따라 이스탄불 거리와 그 변화상을 그리고 있다.

1950년대 이스탄불은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든 탈향민으로 넘쳐난다. 메블루트의 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다. 큰 키에 맑은 눈을 가진 메블루트는 보기 드물게 정직한 소년이었다. 69년 열두 살이 된 그는 아버지를 따라 이스탄불로 온다.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요구르트를 팔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메블루트는 친척 결혼식장에서 소녀 라이하에게 반한다. 3년간 라이하에게 수백 통의 연애편지를 쓴다. “당신의 시선은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겨 나는 당신의 노예가 되었다”고. 사랑에 빠진 둘은 한밤중에 도망을 친다. 그러나 가까이서 처음 본 라이하의 얼굴은 자신이 사랑했던 그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는다.

“메블루트는 지금 자신이 빠져들고 있는 낯선 침묵이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리라는 걸 느꼈다.” 그는 삶의 덫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잠든 라이하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을 때 메블루트는 책임감과 함께 행복감마저 느낀다. 그는 라이하를 기꺼이 아내로 맞고 그녀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아이를 낳고 터키 전통 음료 ‘보자’를 팔며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나 라이하의 동생 사미하가 본래 자신이 반했던 소녀라는 걸 알게 되면서 메블루트는 혼란에 빠진다.

소설은 보자 장수 메블루트의 일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파묵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처럼 여러 화자가 자기 관점에서 사건을 묘사한다. 특히 여성들의 독백이 생동감을 더한다. “남편 옆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면 질투가 나기 마련이라는 말은 나를 더더욱 질투로 활활 타오르게 했다.” 또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에게 드리워진 그늘을 실감케 한다. 라이하는 자기를 때리지 않는 남편을 만난 걸 행운으로 여기고 동생을 억지로 시집보내려는 아버지에게 “우리는 파는 물건이 아니에요”라고 항의한다.

책을 읽노라면 이스탄불의 변천사를 다큐멘터리로 보는 느낌이 든다. 노점상, 중매결혼, 불법 전기 사용, 군사 쿠데타, 고층 아파트로 변화…. 급격히 도시화된 서울의 모습이 떠오른다. 파묵이 천착하는 주제 ‘충돌’은 이 소설에서도 선명하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메블루트가 파는 ‘병아리콩밥’은 더러운 음식으로 치부되고 ‘보자’는 시대에 뒤떨어진 음료가 된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양심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 삶을 선물로 받아들인다. “나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라이하를 사랑했어.” 메블루트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다. 사라져가는 것, 오래된 것을 긍정하고 그리워하는 모습이 애잔하다. 적지 않은 두께지만 은근한 감동이 일어나고 재미있게 읽혀서 책을 내려놓기 어렵다.

파묵은 2006년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번 작품은 그의 아홉 번째 장편이다. 지난해 맨부커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다. 파묵은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인생의 역작을 저술하는 희귀한 작가가 됐다”(인디펜던트)는 찬사를 들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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