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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士들의 뒷얘기가 마음속에 담긴다

입력 2017-11-23 05:10:03
경남 하동군 악양면 구재봉 활공장에서 본 평사리. 지리산 형제봉 아래 자리한 ‘최참판댁’ 앞으로 ‘토지’의 배경이 된 들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그 왼쪽으로 저녁노을에 물든 섬진강이 소설 속 인물과 이야기를 모두 품은 듯 유장하게 흐르고 있다.
 
유럽식 건물이 이국적인 풍광을 그려내는 경남 남해독일마을.
 
하동 최참판댁 인근 조씨고가.
 
남해 금산 상사바위에서 본 풍광.
 
최영욱 시인(왼쪽)과 석숙자 전 파독 간호사.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추진하고 있는 ‘지역 명사(名士)와 함께하는 문화여행’은 천편일률적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인적자원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대한민국에 숨겨진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지역의 역사와 삶을 함께한 고품격 스토리텔러(이야기꾼)를 통해 인생담과 지역 고유의 문화관광 콘텐츠를 접할 수 있다. 지역명사로 선정된 시인 최영욱(60) 평사리문학관장과 파독 간호사 출신 석숙자(69)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경남 하동과 남해로 문화여행을 떠나보자.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의 애환과 소설 ‘토지’의 땅을 일군 열정과 꿈이 가슴 깊이 다가온다.

■ 하동 평사리문학관장 최영욱 시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는 ‘토지’가 있다. 땅의 이야기를 끌어낸 위대한 작가와 소설의 주인공들은 ‘최참판댁’에 머물러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섬세한 표현으로 풀어놓은 이야기꾼이 함께한다.

평사리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인 고(故) 박경리 선생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곳이었다. 선생의 고향은 경남 통영이고 결혼을 하고선 인천에 머물렀다. 토지를 집필한 곳은 강원도 원주다. 하지만 지나다 본 평사리 들판은 작가에게 소설의 영감을 줬다.

최참판댁은 고택이 아니다. 오래된 가옥에서 소설이 나온 것이 아니라 작품이 이곳을 탄생시켰다. 소설을 모티브로 2001년에 만들어졌고, 2004년 드라마 ‘토지’가 촬영됐다.

앞마당에서 최참판이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솟을대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뒤로 돌아 평사리 들판을 내려다본다. 악양 벌판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그 땅을 지리산이 넉넉히 끌어안고 있다. 멀리 들판 한 가운데 ‘부부송’이 다정하게 마주보고 있다. 용이와 월선이 소나무라고도 한다. 훤칠하고 단아하다. 과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토지’ 속 이야기보다 더 큰 삶을 살았을 듯하다.

대문을 들어서면 집의 규모를 느낄 수 있는 행랑과 안채다. 동쪽으로는 탁 트인 누마루가 인상적인 사랑채와 뒤채가, 서쪽으로는 주인공 서희가 기거하던 별당이 있다.

반대편 구재봉 활공장에 오르면 더욱 선명하다. 산으로 둘러싸인 274만㎡(83만여 평)의 기름진 땅이 두부를 잘라놓은 듯 발아래 정갈하게 펼쳐진다. 왼쪽 섬진강이 S라인으로 느릿느릿 흐른다. 섬진강 오른쪽으로 들판이 호로병 모양으로 누워 있다. 멀리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도 한눈에 들어온다.

평사리에서 ‘토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시인 최영욱 평사리문학관장이다. 악양이 고향인 그는 토지를 읽고 소설과 작가에 매료됐고 다른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시인은 ‘평사리’와 ‘최참판댁’을 소설 속에서 현실로 꺼내온다. 한옥 가옥 구조에 이어 소설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박경리 작가와 얽힌 뒷얘기를 잔잔하게 풀어낸다.

시인에 따르면 평사리문학관 건립이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었다. 박경리 선생의 강직하고 겸손한 성품에 부딪혔다. 8년간 어머니같이 모셨지만 하동에서 원주로 ‘삼고초려’를 넘어 ‘칠고초려’를 한 뒤에야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시인은 “박경리 선생의 허락엔 박완서 선생의 힘이 컸다”고 회상한다. “두 분은 6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서로에게 ‘엄마와 딸’ 같은 존재였다”고 전한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박완서 작가를 박경리 선생이 배추속대국을 끓여 먹이며 보살폈던 일화 등 뒷얘기도 들려준다. 김동리 선생이 시인을 준비하던 박경리를 소설가의 길로 이끌었던 사연도 곁들인다.

최영욱 시인은 최근 세 번째 시집 ‘다시, 평사리’를 내놨다. 두 번째 시집 ‘평사리 봄밤’에 이어 8년여 만이다. 최참판댁 주변에 많은 대봉감을 개치나루와 하동포구로 가는 길을 밝히는 가로등으로, 농부의 웃음으로, 따뜻한 호롱불로 비유했다.

■ 남해독일마을 석숙자 문화관광해설사

경남 남해군 삼동면에 유럽식 건물이 이국적인 모습을 자아내는 곳이 있다. 하얀색 벽에 뾰족한 붉은색 지붕, 예쁜 무늬의 창문 등 동화 속 그림 같은 집들이 들어서 아름다운 풍광을 펼치고 있다. 마을의 모습만 떼어놓고 보면 실제 유럽에 온 착각이 들 정도다. 젊은 시절 가난한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독일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근무하다 귀국한 교포들이 모여 사는 ‘독일마을’이다.

독일마을은 남해군이 1960년대 독일에 파견됐던 교포들의 고국 정착을 돕고, 이국 문화를 경험하는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해 2001년 조성했다. 독일에서 직접 건축 자재를 가져와 전통 독일양식으로 집을 지었다.

독일마을 맨 위쪽 독일광장에 파독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에 불과했던 시절 파독 역사를 파독(역사적 현실), 역경(광부·간호사로서의 삶), 환향(남해 독일마을로) 등 공간별로 주제를 나눠 보여준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삶과 열정, 애국을 느낄 수 있는 영상물이 상영되고 곳곳에 당시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글귀들이 붙어 있다.

독일마을을 찾는 방문객은 연간 1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성과 차별성이 없는 전원마을과 한옥마을이 아닌 파독 간호사와 광부의 이야기가 담긴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전시관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는 석숙자씨는 경북 의성 출신으로 독일에서 30년간 간호사로 근무하다 돌아와 독일마을 1호 주민이 됐다. 그는 이제 ‘지역명사’가 돼 작업도구와 생활용품 등 전시품들을 설명해준다. 탄광에서 쓰인 착암기, 막장램프, 광부복과 간호사들의 병원생활을 보여주는 청진기 등을 전시한 전시장 앞에서 당시 경험담까지 곁들인 스토리를 상세하게 풀어놓는다.

석씨는 “1973년 20㎏짜리 가방 하나를 들고 독일공항에 내리니 앞이 캄캄했다”며 “너무 막막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저 인솔자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어지는 생활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김치 등 음식 때문에 설움도 많이 받았다. 이때 입은 마음의 상처로 석씨는 아직도 마늘을 먹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간호사들은 처음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단순 허드렛일을 떠안았다. 몸이 백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힘든 일이 몰리기도 했다. ‘백의(白衣)천사’가 아니라 ‘백(百)의 전사(戰士)’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묵묵히 일을 잘해 결국 ‘코리아 에인절’로 인정받았다.

2010년부터 개최중인 맥주축제도 한몫했다. 뮌헨 옥토버페스트를 벤치마킹해 매년 10월에 개최하는 맥주축제에 올해 10만여 명이 찾을 정도로 인기다. 준비한 음식이 순식간에 동이 날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석씨는 “독일마을은 독일의 문화를 우리나라에 전달하고 우리 국민들이 독일을 이해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며 “유명세를 타면서 관광객들은 급증했지만 정작 주민들은 많은 제한 속에 살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하동·남해=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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