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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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고승욱] 굴비가 무슨 죄

입력 2017-11-27 17:35:01


한국인이 좋아하는 생선을 꼽으라면 단연 조기다. 지역과 동네에 따라 평가가 다르지만 서울을 포함한 서해 쪽에서는 그렇다. 얕은맛이 우리 입맛에 딱 맞는데다 많이 잡히는 만큼 값도 싸 두루두루 사랑을 받았다.

옛 선비들은 조기에는 때가 되면 제자리를 찾아오는 예(禮), 소금에 절여도 모양이 구부러지지 않는 의(義), 속이 깨끗해 부끄러움을 아는 염(廉), 더러운 무리에 끼지 않는 치(恥)가 있다고 칭송했다. 조선시대에는 벼슬아치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예의염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니 조기는 바닷속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 물고기였던 셈이다.

조기는 회유성 어종이다. 2월 말 추자도, 3월 초 흑산도 앞을 지나 서해로 북상하면서 4월 말까지 우리나라 쪽 얕은 바다에 알을 낳는다. 한두 달 안에 많은 양이 잡히니 소금에 절여 말려 먹는 방식이 제격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사람들은 4월이면 조기를 한가마니씩 사서 말린 뒤 1년 내내 먹었다. 바닷가에서는 음력 3월 중순인 곡우 때 잡은 조기를 말려 굴비로 시장에 팔았다.

굴비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세도가였던 이자겸이 처음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중기 예종과 인종 2대에게 딸 3명을 시집보낸 이자겸은 권력 싸움에서 패해 전남 영광으로 귀양을 갔다. 이때 말린 조기구이 맛에 감탄하고는 굴비(屈非·굽히지 않는다)라고 적어 왕에게 보냈다. 맛있는 생선을 보내지만 몸을 굽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요즘 굴비가 갑자기 주목을 받는다. 제철도 아니고 명절도 한참 남았는데 갑자기 관심이 쏟아진다. 게다가 내용은 굴비를 비난하고 성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농축수산품 선물 상한액을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바꾸는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김영란법) 시행령 개정안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문재인정부에 실망감을 토로한다.

우리 사회에서 명절 때 선물을 받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기에 관련 산업 운운하며 기준을 바꾸느냐는 것이다. 10마리씩 담은 선물세트에 김영란법 위반 소지가 있다면 두세 마리씩 나눠 소포장 상품을 개발하는 노력은 해봤느냐는 비난도 있다. 그런데 수많은 농축수산품 중에서 유독 굴비에게 포탄이 쏟아질까. 예의염치가 있는 조기, 몸을 굽히지 않는 굴비에 담긴 뜻을 김영란법 기준액 조정을 주도한 이낙연 국무총리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글=고승욱 논설위원, 삽화=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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