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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문명은 목적의 산물’ 관념에 반기

입력 2017-12-22 05:05:01
볍씨. ‘문명은 부산물이다’는 인류가 우연히 야생 벼를 수확해 먹기 시작하면서 수렵의 시대가 저물고 농경이 시작됐다고 한다. 출판사378 제공




“한걸음만 소변기 앞으로 다가오세요. 문명이 더 가까워집니다.” 중국 남자 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문명이란 단어가 이처럼 뒤쫓아야할 선진문화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런 중국에서 문명에 대해 대담하고도 새로운 시각을 담은 책이 나왔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2015)에 견줄만한 노작이다. ‘사피엔스’가 인지·농업·과학의 3대 혁명을 중심으로 인류사를 시간 순으로 기록했다면 ‘문명은 부산물이다’는 족외혼·농업·문자·제지·조판인쇄·활판인쇄 6가지를 사례로 문명이 우연한 부산물이라고 설명한다. 문명이 발전을 향한 목적의 산물이라는 관념에 과감하게 도전한다.

저자 정예푸의 비범한 논증은 첫 번째 족외혼제 사례에서부터 단박에 드러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에밀 뒤르켐, 지그문트 프로이트,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족외혼을 얘기하기 위해 그가 인용한 학자들이다. 그는 150년간 이어진 논쟁을 조목조목 정리하면서 근친교배 금지가 자손의 체질저하를 가져온다는 인식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족외혼이 확립된 이유는 “구성원 상호 간의 성적 충동으로 인한 내부 질서의 파괴를 막기 위해 근친상간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또 인류의 기질상 같이 자란 이성에 대한 성적 관심이 낯선 이성에 대한 그것보다 약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질서를 유지하려는 예기치 않은 동기가 오늘날 광범위한 연애결혼의 낭만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발한 발상이 눈에 띈다. 무기의 발명이 일부일처제 발전에 공헌했다는 대목이다. 무기가 발명되면서 남성간 힘의 균형이 이뤄졌고 그러면서 다수의 남자가 배우자를 얻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 근거로 창과 칼이 보편화되면서 부족간 힘의 균형이 생겨 전쟁이 멈추고 다른 편에 총과 같은 화기 등장으로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든다.

이런 식으로 문명사를 세밀하게 파고든다. 각국에서 인쇄가 발달한 과정을 살펴보는 부분도 흥미롭다. 장사꾼들이 돈벌이를 위해 익명의 대중을 대상으로 대량으로 책을 찍어냈던 유럽은 인쇄업이 번창했지만 소수 특권계층인 양반을 위해 200∼300권 책을 찍어낸 조선과 같은 나라에서는 활자가 대중화되기 어려웠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왜 역사가 목적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는가. “선조의 위대함은 후대의 위대함을 증명해줄 수 없으니,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신화와 선조를 끌어들이는 수작은 그만뒀으면 싶었습니다.” 그가 서문에서 중국 정부를 향해 한 말이다. 정예푸는 역사를 선전의 도구로 써온 자국에 대해 강력한 비판자이자 실질적 피해자다.

1950년에 태어난 그는 마오쩌둥이 주도한 사회주의운동 문화혁명(1966∼76) 당시 시골로 내려가 10여년간 농사를 지었고 20대 후반에야 대학에 입학했다. 미국 유학 후 중국사회과학원 베이징대 등에서 강의했다. 중국은 여전히 자국 중심의 역사 기록에 힘을 쏟고 있고 정예푸는 이에 대해 계속 쓴 소리를 하는 진보적 지식인이다.

책에는 권위적인 중국 정부를 꼬집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중국사회학회가 이 책을 지난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이유가 짐작된다. 방대한 사료와 인용이 좀 무거운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동양의 관점에서 세계 문명사를 다뤘기 때문에 그 자체로 희귀한 책이기도 하다. 문명사에 대한 균형감과 통찰력을 갖추는데 도움을 줄 아시아판 ‘사피엔스’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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