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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신념’ 위해 목숨까지 던진 의용병들

입력 2017-12-28 20:20:01
1938년 10월 28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국제여단의 고별 열병식에서 한 여인이 의용병을 끌어안고 있다. 자신들을 위해 싸워준 병사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국제여단의 한 의용병은 이날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날은 의용병의 날이었다. 줄을 선 대열로 여자들이 들어와 우리에게 키스를 하고, 남자들은 악수를 나누며 우리를 얼싸안았다. 아이들은 우리의 어깨에 올라탔다.” 갈라파고스 제공




내년에 대학에 진학하는 A군은 최근 스페인 내전에 관심이 생겼다. 친구한테서 이런 말을 들은 게 계기가 됐다. “세계의 현대사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스페인 내전을 공부해야 돼. 스페인 내전은 20세기 수많은 이념이 충돌한 격전의 전장이었거든.”

A군은 호기심이 동했다. 친구처럼 똑똑해지고 싶었다. 그는 스페인 내전을 다룬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친구는 그 유명한 영국 사학자 앤서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을, 더 유명한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를 추천했다.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읽어보라고 했다. A군은 이들 책을 탐독했고 탄복했다.

하지만 언젠가 A군은 알게 될 것이다. 추천도서 리스트에 한 권이 빠져 있었다는 것을. 문제의 작품은 최근 출간된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이 책은 스페인 내전의 기승전결을 전하면서 역사적 맥락까지 가늠할 수 있게 도와주는 스페인 내전 입문서다.

미국 저널리스트인 애덤 호크실드(75)가 썼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수준급인데, 번역까지 매끈하다. 막힘없는 문장이 쭉쭉 이어지니 600페이지 넘는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일단 스페인 내전을 개괄해보자. 이 사건을 설명하려면 1936년 2월로 돌아가야 한다. 이때 치러진 스페인 총선에서 자유주의파 사회주의당 공산당이 연합한 인민전선은 우익 정당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서유럽에서 가장 봉건적인 국가로 평가받던 나라에서 ‘선거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우익 정당 정치인과 자본가에게 이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결국 같은 해 7월 쿠데타가 일어났고 내전이 시작됐다. 여기까지는,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내전의 스토리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쿠데타를 일으킨 반군의 수장 프랑코는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손을 잡는다→공화국을 지키려는 공화파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다→내전은 프랑코가 이끄는 국가주의자군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이 책의 포인트는 다른 데 있다. 저자는 공화파를 돕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혈혈단신으로 내전에 뛰어든 의용병들, 특히 미국 청년들의 삶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역만리 스페인 땅으로 건너와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다. 이들 의용병이 모인 국제여단의 규모는 3만5000∼4만명에 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의용병들이 남긴 일기 편지 등 각종 기록물을 바탕으로 스페인 내전을 재구성했다. 독자들은 이들의 삶을 되새기면서 자간과 행간 사이를 서성이게 될 것이다. 가령 이런 대목이 대표적이다. 전세가 기울면서 국제여단은 해체의 운명을 맞는다. 국제여단 소속 의용병들의 ‘고별 열병식’이 열린 날짜는 1938년 10월 28일. 바르셀로나 거리에는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30만명 넘는 시민이 쏟아져 나왔다. 미국 출신 한 의용병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여자와 아이들이 아들, 형제라고 부르며 우리의 품 안으로 달려들어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어요. 전투밖에 몰랐던 투박한 병사들도 그 모습에 감동해 엉엉 소리 내어 울었어요.”

프랑코가 이끄는 반군과 그들을 상대한 공화파가 각각 얼마나 많은 민간인을 도륙하면서 참극을 벌였는지 묘사한 대목들도 인상적이다. 고명처럼 등장하는 유명 인사들의 이야기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정부주의 민병대의 일원이었던 조지 오웰, 종군기자로 전장을 누빈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시즘의 그늘이 세계를 뒤덮으면서 청년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퍼져나간 사회혁명의 기운이 당시 얼마나 대단했는지 묘사한 내용도 밑줄을 긋게 만든다.

근사한 역사서는 많은 질문을 남기는 법인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공화파가 프랑코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면 스페인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미국 프랑스 영국이 공화파를 적극적으로 도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그랬다면 2차 세계대전도 막을 수 있었을까’….

특히 한국 독자에게 스페인 내전은 각별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 역시 얼마간 내전의 성격을 띠는 6·25전쟁을 겪었으니까. 저자는 “사회적 정의에 관심을 가진 우리 모두는 정치적 조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고 적었다. 책을 읽고 나면 이 문장에 담긴 무게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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