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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인생의 맛’ 보여주는 음식·사람 이야기

입력 2017-12-28 21:05:01
한 레스토랑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셰프들.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은 천재적 미각을 가진 소녀가 역경을 딛고 셰프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픽사베이




시간에도 미각(味覺)이 있을까. 가끔 연말은 지인들과 부딪친 잔의 상큼한 와인 맛으로 기억되고 새해는 떡국 위 색색 고명의 고소하고 단백한 맛으로 아로새겨진다. 최근 나온 장편소설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Kitchens of the Great Midwest)’은 특정한 식재료나 요리를 소재로 천재적 미각을 가진 소녀 에바의 삶을 시간대 별로 따라가는 이야기다.

따돌림 당하던 괴짜가 미국 최고의 셰프가 되기까지의 성장기다. 음식 맛을 떠올리며 에바와 그 주변 인물들의 생애를 기억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여덟 개 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 한 장만 에바의 시각에서 전개된다. 나머지는 에바의 아빠, 사촌 언니, 남자 친구, 남자 친구의 새엄마 등 다른 인물의 관점에서 독립된 이야기처럼 전개된다.

에바의 고향은 미국 미네소타주 트윈 시티스. 작가는 에바의 삶과 미국 중서부 음식에 담긴 매콤 달콤하고 쌉싸름한 기억을 교차시킨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에바의 친부 라르스. “그는 마침내 거실로 달려가 울고 있는 아기를 품에 안아 들었다. 자신이 실수로 태어났다는 말을 에바가 절대로 듣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는 굳게 마음먹었다.”

라르스가 가출한 아내의 편지를 읽는 장면이다. 톡 쏘는 냄새가 지독한 노르웨이 전통 요리 루테피스크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자란 라르스는 고생 끝에 꽤 근사한 식당 셰프가 되고 소믈리에를 꿈꾸는 신디를 만나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아내는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기 에바를 남겨두고 떠난다. 에바는 가난한 삼촌 얄 부부 손에 자란다.

통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장면도 적지 않다. 에바는 좌충우돌하면서도 역경을 헤쳐 나가는 당찬 소녀다. 에바는 나이에 비해 똑똑하다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에바는 벽장에서 매운 칠리 고추 ‘초콜릿 아바네로’를 수경재배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자신을 괴롭히는 남자아이에게 이 고추로 만든 고추기름을 먹여 복수를 한다.

사실 애잔함이 묻어나는 이야기가 더 많다. 에바를 좋아하는 남자친구 프레이거 편. 에바가 프레이거의 마음을 거절하는 대목. “방에 혼자 멍하니 있다 보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 에바의 말을 곱씹었다. 특히 ‘준비가 안 되었다’와 ‘여기 있겠다’는 말이 잊히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은 프레이거처럼 에바의 한때를 들려주면서 자기 삶의 한 단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소설의 놀라운 점은 음식에서 출발한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맛’을 깨닫게 한다는 데 있다. “에바는 그녀의 일부였지만 에바가 이토록 찬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신디가 에바의 일부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친엄마 신디가 성공한 에바를 만난 뒤 깨닫는 내용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부엌에서 자신만의 음식 맛을 만들어 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 J 라이언 스트라돌은 요리 잡지 ‘테이스트’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는 음식 전문가답게 이 소설에서 다양한 음식 재료를 소개하고 요리 레시피를 공개한다. 소설로 쓴 요리책이자 요리로 쓴 소설책 같다. “미식가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 소설을 단숨에 맛있게 먹어 치울 것”이라는 한 서평은 과장이 아닌 듯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등장하는 음식이나 식재료가 스칸디나비아나 어메리칸 스타일이라 낯설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등장인물들이 살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가 된다. 미국 독립서점연합이 2015년 뽑은 올해 최고의 문학상 수상작.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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